서지월 시인 / 꽃잎이여
한 세상 살아가는 법 그대는 아는가. 물빛, 참회가 이룩한 몇 소절의 바람 옷가지 두고 떠나는 법을 아는가.
눈물도 황혼도 홑이불처럼 걷어내고 갓난 아기의 손톱같은 아침이 오면 우린 또 만나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꽃이 피는 것과 소유하는 일이 서로 반반씩 즐거움으로 비치고 있는 그 뒤의 일을 우린 통 모르고 지내노니
흉장의 일기장 속 꼭꼭 숨은 줄로만 아는 풀빛, 그리울 때 산그림자 슬며시 내려와 깔리는 법을 아는가.
눈썹 위에 눌린 천정을 보며 아들 낳고 딸 낳고 나머지는 옥돌같이 호젓이 앉았다가 눈감는 법을 그대는 아는가.
서지월 시인 / 강물과 빨랫줄
오늘도 어머니는 강물을 훔쳐 와 한 자락씩 줄에 너신다. 누런 호박오랭이 썰어 말리듯이
햇빛은 항시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것이지만 얼굴 없는 바람은 부뚜막 위에서 불고 장독대를 넘어와 어머니의 허이여신 머리칼 위에도 분다.
하늘과 땅 그 크낙한 화해를 위해 세상의 이쪽과 저쪽의 분별(分別)을 위해 두 귀 바지랑대는 생명의 줄을 튼튼히 받치고 있다.
천년풍우 그 어느날에도 우리의 제기(祭器), 제기(祭器) 같은 것.
먼 산 그리메 숱한 메밀밭 위으로 낮달이 조을고 젖은 빨래의 그 휴식(休息)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파란 하늘은 아득히 멀고 나는 왠지 눈물이 핑 돈다.
서지월 시인 / 일송정과 해란강
해란강 누이가 일송정을 올려다 보며 `오라버니, 하늘이 너무도 맑아요!’ 하니, 일송정 오라버니는 `누이가 비치고 있는 치마물결 역시 너무나 곱네!` 하며, 둘이는 온종일 정다운 오누이가 되어 있었다
서지월 시인 / 三兄弟 江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삼형제 강! 서으론 압록강, 북으론 송화강 동으론 두만강이다 백두산할아버지는 압록강과 송화강 두만강 삼형제를 길러 길이길이 백의민족 역사 뻗어가라고 잘 길러 내었지 그 강가에서 목 놓아 울기도 했으며 말 달리기도 했건만 아버지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 어디로 가 엎드리었고 들풀만 돋아나 아우성같이 흔들리고 있는가 금 그으며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짓 힐끔 내려다보곤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는 구름송이 그 어느 것에도 마음 달래 수는 없었다
서지월 시인 / 백도라지꽃의 노래
내 마음 알리 뉘 있으리 말(馬)은 천리를 가고 물은 만리를 흐른다 하나, 길을 가다가 客死한 사람들의 발자국 이미 지워진지 오래 무덤 위에 핀 무덤꽃같은 흰옷 입고 입 맞추는 바람꽃 같은 내 마음 속 깊은 뜻 뉘라서 알리 오직 말 못하는 죄 하나로 코 박고 살아도 지나간 천년의 세월 서럽다 생각하기 전에 꽃대궁 밀어올려 말없는 잠 長天에 풀어내는 것을 어이타 나를 두고 떠나시는가 어느 집 문간에는 적막을 깨뜨리는 哭소리 차마 투정하듯 바라볼 뿐이네
서지월 시인 / 신 귀거래사(新 歸去來辭)
꽃은 피어서 무색하지 않고 바람은 불어서 가면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 옷자락 끝에도 풋풋한 인정은 피어나고 새소리에 귀 열리나니
오, 하늘 아래 해와 달 별들이 늘 곁에서 무병장수 빌어주나니
숲이 우리들 식탁인 것을 흙이 우리들 양식인 것을
구름 떠 오면 늘 그대로인 청산이 반가운 손님 맞이하듯
훈훈한 돌의 향기와 흐르는 물소리의 여운이 피 맑게 해 주나니
벗이어, 한 바가지의 물 버들잎 띄워 천천히 들이키듯 우리 목 축이며 살아가세
서지월 시인 / 한국의 달빛
쟁반 위에 놓여져 床을 받치고 더러는 바람부는 청솔가지 솔잎 사이로 물소리 흩뿌리는 수작을 걸면서 억겹 산을 넘어 지름길로 오는구나.
玉돌이야 갈고 닦아 서슬이 푸른 밤 싸늘한 바위 속 어둠 밝히며 쟁쟁쟁 울려오는 은쟁반 소리 은쟁반 위의 거문고, 바람이 훔쳐내는 나의 파도소리…….
옛날엔 이런 밤 홀로 걸었노라. 걸어서 거뜬히 몇 십리도 갔노라 짚세기 신고 돌담길 세 번쯤 돌아 모시적삼 남끝동 임을 만나고 수줍어 돌아서는 강물도 보고 손 포개고 눈 포개고 달빛 또한 포갰노라.
창망히 멀어져 간 수틀 위 꽃밭과 애달피 구슬꿰는 피리소리가 시렁 위에 얹혀서 돌아올 때면 쑥꾹쑥꾹 쑥꾹새는 숲에서 울고 칭얼칭얼 어린것은 엄마품에 잠든다.
서지월 시인 / 비슬산 참꽃
비슬산 참꽃 속에는 조그만 초가집 한 채 들어 있어 툇마루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 쿵쿵쿵쿵 가슴 두들겨 옵니다
기름진 땅 착한 백성 무슨 잘못 있어서 얼굴 붉히고 큰일 난 듯 큰일 난 듯 발병이 나 버선발 딛고 아리랑고개 넘어왔나요
꽃이야 오천년을 흘러 피었겠지만 한 떨기 꽃속에 초가집 한 채씩 이태백 달 밝은 밤 지어내어서 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어머니 누나들 그런 날의 산천초목 얄리얄리 얄랴셩 얄랴리 얄라, 쿵쿵쿵쿵 물방아 돌리며 달을 보고 흰 적삼에 한껏 붉은 참꽃물 들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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