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호 시인 /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베어 묶어둔 빗줄기가 뒷마당에 다발로 쌓여 있었다
금낭화는 네 개의 유골단지를 쪼르르 들고 꽃가지가 휘었다
뒷산에서 잠시 내려온 아버지와 큰형과 둘째형과 똥개 메리는 대화를 나눌 입이 없고
서로를 무심히 통과하면서 물웅덩이마다 둥근 발자국을 그려놓았다
헛기침에도 꽃이 떨어져 깨질까봐, 그들의 빈 눈과 마주칠까봐,
나는 먹구름과 함께 발뒤꿈치를 들고 그 집을 나왔다
첫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봄이 벌써 반 이상 떨어지고 없었다
길상호 시인 / 당신을 환영합니다
어제는 골목이 다리 절던 고양이, 삼색이를 끝내 지워버렸어요 다 지우진 못하고 피 묻는 털 뭉치를 얼룩으로 남겼어요 집 앞에 불길한 그림이 붙었다고 당신은 물을 뿌려 솔질을 하고, 풀어진 그림은 절룩이면서 하수구를 향해 걸어갔어요 그때 택시가 지나가면서 다시 한번 그림을 찢어놨어요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수많은 고양이들이 물방울이 되어 날아갔어요 담벼락에 가 닿은 몇 방울은 주르륵 꼬리처럼 길게 자랐다가 이내 말라버리고 화단에 떨어진 몇 방울은 눈동자를 굴리다 흙 속에 스미기도 했어요 아무튼 삼색이는 핏빛을 더해 사색이 되어 떠났고 나는 무사히 나의 현관 안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언제 따라왔는지 방은 이미 빨간 고양이들로 가득했어요 발을 옮긴 자리마다 벽지에 아픈 별이 하나씩 돋아났어요, 마치 환영처럼
길상호 시인 / 씨감자
숨소리가 끊기고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손가락마다 검푸른 싹이 돋아 있었다 장의사는 공평하게 당신을 쪼개서 가족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명치에 묻어둔 한 조각 당신이 꽃을 피워 올릴 때마다 꺾고 또 꺾고 당신의 무덤을 짓고 난 후로 두 눈은 소금으로 만든 알약, 사는 게 밋밋해질 때마다 깨뜨려 찍어먹는 검버섯이 번지던 한쪽 볼을, 파랗게 멍이 든 무릎을, 딱딱하게 굳어가던 뒤꿈치를, 오늘도 썩은 감자처럼 당신을 도려내다 보니 남은 새벽이 얼마 되지 않았다
길상호 시인 / 우리의 죄는 야옹
아침 창유리가 흐려지고 빗방울의 방이 하나둘 지어졌네 나는 세 마리 고양이를 데리고 오늘의 울음을 연습하다가 가장 착해보이는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 앉았네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 들키고야 말 일을 미리 들킨 것처럼 페이지가 줄지 않는 고백을 했네 죄의 목록이 늘어갈수록 물의 방은 조금씩 무거워져 흘러내리기 전에 또 다른 빗방울을 열어야 했네 서로를 할퀴며 꼬리를 부풀리던 날들, 아직 덜 아문 상처가 아린데 물의 혓바닥이 한 번씩 핥고 가면 구름 낀 눈빛은 조금씩 맑아졌네 마지막 빗방울까지 흘려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되어 일상으로 폴짝 내려설 수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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