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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보경 시인 / 쉬땅나무와 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7.

하보경 시인 / 쉬땅나무와 나

 

 

개개비사촌은 특이한 울음소리를 낸다

개개비는 거의 울지 않는다

 

애인이 떠난 날은 생각보다 쓸쓸하지 않아서 가끔 손톱 밑 연두를 떠올리기도 한다

길고양이가 비를 피해 파란 천막 아래 숨었다

천막 안 허공을 투득투득 두드리는 손님 같은 빗소리에 내 손가락이 고양이 소리를 낸다

손가락은 공이 되었다가 곰이 되기도 한다

자주 그런 건 아니다

 

비에 젖어 까매진 나무에 이상한 새가 흘러들었다

 

개개비인가

개개비사촌인가

 

새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빗소리에 잠긴

까만 나무에 잠긴

내 손가락에 잠긴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푸른 구멍

 

쉬땅나무와 나와

익숙지 않은 감정과 거리가 잠긴

 

개개비사촌은 울고

개개비는 울지 않는다

 

쉬땅나무에 가서 다 말하면 된다

울거나 , 울지 않거나

쉽게 잠기는 것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만 하면 된다

 

손톱이 까맣게 되는 건 아니다

 

시집 『쉬땅나무와 나』(현대시, 2021) 중에서

 

 


 

 

하보경 시인 / 어느 날 낯선 구름 안에 내가 갇혀 버린다면

 

 

그가 다녀간 일이 있다 그럴 것이다

어제의 어제, 그제의 그제, 이런 잔상들을 버리려고 애쓰지만

 

차고 따듯한 천지가 어울리고 뒤섞여

뭉게뭉게 끝도 없는 무늬를 게워내는

무진장한 그늘, 무량한 그림자

 

보이지 않게 흐르는 기쁨과 슬픔 들을

모두 토해낸다면

끝없이 밀어내며 밀려가는

저 구름의 뼈대를 쥐어짜고 흐르는 푸른 계곡과

빽빽한 숲을 후두득 훑고 가는

거친 바람과 마주한다면, 그렇다면

 

그가 다녀간 일이 있다. 아니, 그럴 것이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생각이 합쳐서 하나가 될 때도 있지만

 

손을 내민다 할 일이 없을 때, 할 말이 없을 때

가만히 입술을 내민다 빗방울이 가볍다

마법처럼 사라진 새를 부른다

 

그가 다녀간 일을 알리려고 그가 왔다

 

시집 『쉬땅나무와 나』(현대시, 2021) 중에서

 

 


 

하보경 시인

서울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졸업. 2014년 《시사사》로 등단. 2020년 제6회 시사사작품상을 수상. 2021년 첫시집 『쉬땅나무와 나』가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