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은영 시인 / 여름
낮잠을 자는 붉은 지붕들 고양이들도 그늘에서 쉬는데 여름 태양이 혼자 날름날름 짧은 혀로 물을 찍어 먹는다
곽은영 시인 / 비정형 사춘기
너의 편지를 건조한 화장실에 내려놓고 나는 배꼽을 보며 묻는다
오늘 밤만은 온전히 너를 추억할 수 있겠구나
우리의 문법으로 걷기 위해서 신발 가득 철벅철벅 발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고인 채 아픈 줄도 몰랐고 다만 갈증이 있었지
더, 제발
마치 밤의 자식임을 처음 깨닫듯 달 없는 밤에 뿌린 순무처럼 쑥쑥 자라
더러운 머리칼과 찌든 쇠 냄새 화물열차의 먼지 흔들리는 등불의 욕설과 무표정 1명만 빼고 모두 경로를 이탈한 마라토너들 같은 시절
밤은 부끄러움을 가져가버리고 어디쯤 가고 있는지 모를 어둠을 주었지
위풍당당한 아버지의 다리는 바지의 트릭이었고 어머니의 다리는 등이 굽은 만큼 휘어져 있었다
흐르는 불빛이 다정하게 번지는 왼쪽 얼굴과 흐르는 불빛에 험하게 구겨진 오른쪽 얼굴의 밤들
싫어, 이런 감정
밟히는 것이 말똥이든 누군가의 연민이든 무작정 걷고 달려 마침내 어둠 속에서 네 손도 놓치고 내 목소리도 아득해 혼자 돌아와 밝아오는 새벽에 울고 말았지
양순해진 얼굴로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발을 가지런히 현관에 놓는 영악함 밤이 비로소 두 손의 부끄러움을 주었어
야옹야옹 문밖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를 못 들은 척 네가 손을 놓았다고 애써 덮으려 했던 그 밤
오늘 밤은 온전히 추억할 수 있겠구나 온통 하얗고 검고 붉었던 별들이 있었던 시절들을
곽은영 시인 / 불한당들의 모험 35 -아름다운 턱시도 고양이들은 짧은 여름밤을 우아하게 말아올린다
우리는 그냥 그렇게 서서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나는 너의 말을 모르고 너도 나의 말을 모르는데 너는 꼬리를 내리고 나는 물끄러미
우리 둘 사이에는 흐르는 밤이 하나 침묵이 둘
곽은영 시인 / 불한당들의 모험 46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 수 없어서 고유하고 외롭다
까마귀가 반짝이는 거울을 모아가듯 시간의 기류를 타고 나는 두 발의 컴퍼스로 지도를 그려갔다 태양의 위도와 바람의 경도가 만나는 점이 내가 서 있는 곳이었지
그늘을 받아먹던 흰 벽에 누런 응달 자국이 앉을 무렵 지도는 그려질 줄 알았어 자오선은 길게 펼쳐졌는데
당신이 여기 있어도 같은 시간을 살 수 없는 우리 사이에 희멀건 강이 눈부시게 흘렀다
강은 언제나 저만큼 웅크려 있다가 나의 다가섬만큼 모양이 변했다 경계를 나누기 힘든 햇살처럼 강은 측량하기 곤란한 빈칸
우연 같은 위도와 필연 같은 경도가 내게서 만나는데 당신은 당신의 자오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
침착해서 서글픈 물결을 이기고 돋보기로 모은 태양점처럼 희멀건 강을 분홍코끼리 한 마리가 건너가길 바랐다
당신과 내가 여기 있어서 그릴 수 없는 길고 깊은 강과 마주섰다
당신은 잠깐 고개를 들었고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지 비극의 첫 페이지가 무난하게 시작하듯 무심한 강은 눈부시게 흘렀다 탐 다오 탐 다오 코끼리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곽은영 시인 / 고양이 구출작전
담 아래 개처럼 엎드린 눈이 나무 위에 새처럼 졸고 있던 눈이 일어선다 스르륵 일어나 걸어온다 여보, 산이 움직여요 무슨 소리야 TV보게 안경 좀 줘봐 물 박자국 찍으며 오물오물 씹던 껌을 담벼락에 붙여놓고 녹는다 녹아서 문밑으로 밀려 들어온다 집이 온통 물에 잠긴다 왜 물이 빠지지 않지? 당신, 배관공을 불러봐 그러나 배관공은 굴뚝에 빠진 고양이를 꺼내기에 바빴다 그는 굴뚝의 깊이를 알기 위해 기름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야옹야옹 굴뚝을 간질이며 올라오는 고양이의 대답 지하실에는 죽은 쥐가 싹튼 감자와 함께 떠다녔다 변기에 버린 금붕어가 다시 돌아왔다 냉장고 위에 올라앉은 남편이 투덜거렸다 천장이 머리에 닿았다 집을 더 높이 지어야 했어 나란히 앉은 아내가 걱정스럽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으로 비상구를 낼 걸 그랬어요 남편은 TV 안테나를 뽑아 천장을 쿡쿡 찔러본다 이것 봐, 말랑말랑해 차오르는 물을 내려다보던 아내가 벽을 짚어본다 여보, 집이 점점 부풀고 있어요 남편은 냉장고 위 드라이버를 집어 천장을 뚫기 시작한다 당신도 좀 거들어 구두처럼 앉아만 있을 거야? 아내는 냉장고 위에서 그들의 결혼광고가 실린 신문을 찾았다 신문은 북어처럼 누렇게 잘 말라 있었다 갑자기 아내는 신문을 둘둘 말아 남편의 등과 머리를 패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양반 아야, 이게 무슨 짓이야 아프잖아 남편은 신문대롱을 빼앗아 휙 던져버렸다 날아간 신문대롱이 천장을 뚫고 배관공의 엉덩이를 찔렀다 배관공은 갑자기 솟아난 신문 굴뚝을 놀란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배관공과 부부가 반짝 눈이 마주친 순간, 휙휙휙 남편과 아내는 손을 꼭 잡고 집밖으로 튕겨 날아갔다 배관공의 빨간 모자도 날아갔다 그들은 훌쩍 풀밭에 떨어져 아내는 부스스한 머리를 쥐고 남편은 부러진 안경다리를 잡고 돼지오줌보처럼 쭈글쭈글해진 집을 쳐다보았다 배관공은 발톱에 긁히지 않고 꺼낸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 검댕이 약간 묻었을 뿐이다 야옹야옹 고양이의 나른한 윙크
2006 문예중앙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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