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애 시인 / 교감 - 시 ·시인 ·나
그의 시선은 언제나 풍경의 소실점에 닿아 있다. 길이 끝난 그곳에서 그의 텅 빈 시선이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다에 가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그를 쫓아
철 지난 해변의 산책로를 걷는다. 우리의 침묵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섬과 섬 사이 파도는 쉼 없이 물보라를 날리고 회색 구름은 먼 하늘로 천 갈래 길을 만들고 있다. (그래 그의 사랑도 나의 사랑도 잠시 놓아두자, 그대로의 집착들을 바라보자)
해변에는 소나무 숲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갯벌에 내려앉았던 바닷새들도 곡선을 그리며 석양 속으로 사라진다 얼핏 석양이 기울고
붉은 물 가득한 하늘 끝자락에서 황금빛 주단을 깐 길이 내게로 온다. 바다도 그도 짙푸른 그림자가 되어 겹겹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허정애 시인 / 푸른 재킷을 걸친 작가
멋진 삶이라구요? 눈빛이 깊다구요?- 이 자리에 불린 이유인지 모르지만- 난 그저 얼빠져 있을 뿐이에요 사방에서 조여오는 사냥개 짖는 소리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짐승일 뿐예요 써야지, 써야지, 써야 한다, 컹-컹- 컹, 귀를 막아도 소용없어요 연명하듯 한 편 쓰고 나면 감을 잃기 전에 한편 또 한 편,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죠 그냥 헐떡거리는 거예요 야만스럽기 짝이 없는 삶이에요 감흥의 순간? 행복? 그야 써지는 동안은 즐겁죠 퇴고도 재밌어요 당신이 선량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지만 나는 옳거니! 당신의 일언일구를 머릿속 서랍에 넣어두고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낯설고 따뜻한 냄새- 사람들 말소리-집기들 부딪히는 소리- 프로방스 풍의 벽장식들-특별히 당신이 앉아 있는 조가비 같은 라탄의자를 어떻게 써먹을까 궁리하고 있어요 거기다 창밖의 눈발이라니 빌어먹을, 사냥개들이 열에 들떠 짖어대는군요 마음 편할 날이 없어요 가봐야겠어요 정신을 갉아먹히기 전에,
(2013년 <예술가> 봄호)
허정애 시인 / 타자들에의 배려
무슨 생각을 해? 당신은 물었지만 내 안의, 나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무수한 타자들의 생각을 나라고 어찌 다 알겠는가. 마는, 차창 밖 흩날리는 눈발에서 눈을 거두고 내의식의 숭숭 뚫린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지. 오 - 살찐 몸을 굼실거리며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분노의, 질시의, 비굴의, 영악의, …… 역한 벌레들이라니. 그러나 나는 침묵할 것이다, 눈발에 지워지는 거리의 간판이나 훑으며. 당신은 오늘도 높은 단상에 올라 누군가를 비난하고 단죄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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