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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정애 시인 / 교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8.

허정애 시인 / 교감

- 시 ·시인 ·나

 

 

그의 시선은 언제나 풍경의 소실점에 닿아 있다.

길이 끝난 그곳에서

그의 텅 빈 시선이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다에 가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그를 쫓아

 

철 지난 해변의 산책로를 걷는다.

우리의 침묵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섬과 섬 사이

파도는 쉼 없이 물보라를 날리고

회색 구름은 먼 하늘로 천 갈래 길을 만들고 있다.

(그래 그의 사랑도 나의 사랑도 잠시 놓아두자,

그대로의 집착들을 바라보자)

 

해변에는 소나무 숲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갯벌에 내려앉았던 바닷새들도

곡선을 그리며 석양 속으로 사라진다

얼핏 석양이 기울고

 

붉은 물 가득한 하늘 끝자락에서

황금빛 주단을 깐 길이

내게로 온다.

바다도 그도 짙푸른 그림자가 되어

겹겹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허정애 시인 / 푸른 재킷을 걸친 작가

 

 

 멋진 삶이라구요? 눈빛이 깊다구요?- 이 자리에 불린 이유인지 모르지만- 난 그저 얼빠져 있을 뿐이에요 사방에서 조여오는 사냥개 짖는 소리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짐승일 뿐예요 써야지, 써야지, 써야 한다, 컹-컹- 컹, 귀를 막아도 소용없어요 연명하듯 한 편 쓰고 나면 감을 잃기 전에 한편 또 한 편,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죠 그냥 헐떡거리는 거예요 야만스럽기 짝이 없는 삶이에요 감흥의 순간? 행복? 그야 써지는 동안은 즐겁죠 퇴고도 재밌어요 당신이 선량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지만 나는 옳거니! 당신의 일언일구를 머릿속 서랍에 넣어두고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낯설고 따뜻한 냄새- 사람들 말소리-집기들 부딪히는 소리- 프로방스 풍의 벽장식들-특별히 당신이 앉아 있는 조가비 같은 라탄의자를 어떻게 써먹을까 궁리하고 있어요 거기다 창밖의 눈발이라니 빌어먹을, 사냥개들이 열에 들떠 짖어대는군요 마음 편할 날이 없어요 가봐야겠어요 정신을 갉아먹히기 전에,

 

(2013년 <예술가> 봄호)

 

 


 

 

허정애 시인 / 타자들에의 배려

 

 

 무슨 생각을 해? 당신은 물었지만 내 안의, 나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무수한 타자들의 생각을 나라고 어찌 다 알겠는가. 마는, 차창 밖 흩날리는 눈발에서 눈을 거두고 내의식의 숭숭 뚫린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지.  오 - 살찐 몸을 굼실거리며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분노의, 질시의, 비굴의, 영악의, …… 역한 벌레들이라니. 그러나 나는 침묵할 것이다, 눈발에 지워지는 거리의 간판이나 훑으며. 당신은 오늘도 높은 단상에 올라 누군가를 비난하고 단죄했지만.

 

 


 

허정애 시인

서울여자대학교 졸업. 1999년 《문예사조》를 통해 등단. 시집『신의 아이들은 춤춘다』(한국문연, 2007)이 있음. 2001년 제1회 짚신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원.국제펜클럽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