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세라 시인 / 나인 핑거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8.

최세라 시인 / 나인 핑거스

 

 

새는 몸 없는 홀로그램 새는

땅 밑에서 솟구쳐 올라 공중을 헤엄친다 넓은 지느러미의

물고기가 되어 몸을 구부린다 첫눈이 오는데 로라는

 

생각나는 사람도 없어서 그냥 제 몸을 끌어안는다

끌어안고 걷는다

 

눈은 세상을 처음 지워본다는 듯 멈칫거리더니 아르곤 가스가 피어오르는 창문틀을 지우고 홀로그램 물고기를 지우고 무너져가는 건물들을 지우고 로라의 콧등을 지우고 로라는

 

도로변 공용 충전기에 몸을 깊숙이 넣는다

충전기 창에 에너지 잔량의 눈금이 올라가는 동안 낮은 허밍을 한다 로라는

 

어떤 늙은 여자가 푸슬푸슬한 머리칼을 빗질하는 걸 본다

어떤 사내가 피범벅이 된 새끼고양이를 한손에 쥐는 걸 본다

 

저만치 노천식당의 키오스크 주문 창을 누르는 여자애가 보인다

만남의 중력이 서로를 파괴하기 전에

 

손가락이 없는 저 여자애를 만나선 안 된다 로라는

몸을 숨긴다

 

로봇 개떼가 나타나 밥그릇을 뒤집어 밑을 핥는다

여자애가 프로틴바를 으깨 만든 수프 그릇을 바닥에 놓는다

로봇 개떼가 그리로 몰려들고 주먹뿐인 손을 내려다보며 여자애는 울먹이고

 

눈발이 멈칫거리기 시작하고  홀로그램 물고기가 홀로그램 먹이를 좇아 내려오다 언 땅에 닿는 순간 땅 밑을 날아가는 새로 변하고

 

37%까지 충전된 로라가 홀로그램 카페를 지나 시간여행자들의 대합소로 걸어간다

수프를 포기하고 달려온 여자애가 로라를 따라붙는다

 

저리 가, 내 인공 심장의 히터는 고장난 지 오래니까!

 

차가운 부동액만 피부밑으로 흐르는 제 몸을 감싸 안으며 로라가 발을 굴러 보인다 이 여자애를 이토록 슬픔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눈빛을 가진 이 소녀를 로라는 외면해야 한다 외면해야 한다 외면하지 못 해 새끼손가락의 나사를 돌려 뺀다

소녀가 제 손의 검지 자리에 로라의 손가락을 끼운다

 

 

-2021년 [문학의 오늘] 봄호

 

 


 

 

최세라 시인 / 청동거울빛 나의 단추

 

 

단추 하나에 외투가 사라지는 이야기예요

 

몸에 맞춰 늘리고 줄이는 사이

내 거죽이 된 낡은 외투

위에서부터 몇 번째인지 말할 수 없지만

유난히 흔들리는 단추 하나 있어요

 

비끄러매고 아퀴 지을수록

팽팽한 실을 견디지 못하고 튈 것 같은

청동거울빛 나의 단추

동그라미 안으로 고인 물결무늬가

내 얼굴 비추다 가만히 흔들어 지워버려요

 

립스틱이 번진 채 거리를 활보하거나

잔고 없는 통장을 거듭 정리할 때 혹은

 

욕망이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쇼핑몰을 헤매다

우연히 스친 누군가 이 단추 떨어뜨리면

내 오랜 외투 하나 옷장 깊숙이 사라질 테죠

벌어진 앞섶, 서서히 거죽이 열려

옷핀으로 여민 치마, 올 풀린 니트

드러나고 말 테니까요

거죽 벗겨진 나도 유야무야 개켜질 테죠

 

단추 하나에 내가 사라지는 이야기예요

 

 


 

 

최세라 시인 / 복화술사의 거리

 

 

구멍에 검지를 끼우면 무엇이든 될 수 있어

 

파인 데에 검지를 댄다

수두 자국에

못이 박혀 있던 마루에 벽에

딱지가 앉을 만하면 후비던 가슴팍에

자정의 비늘에 덮여 가려워 죽겠는 귓구멍에

먹먹한 저녁에 찾아오는 옛사랑 희미한 동공에

개미만큼 조용하게 뚜껑을 열고 기다리는

함정처럼 그러나

 

아주 작은 맨홀 구멍에

 

그 속에 들끓는 쥐들과 그것들의 남루한 위궤양에

암 덩어리를 떼어낸 자리에

 

그것들이 다시 주렁주렁 매달린 감자를 뜯어내고

생으로 뽑힌 머리카락 들어 있던 모공 주머니에

가난이 떼 버렸던 태아 심장 있던 자리에

떨리는 입술에 다시 절규하는 목구멍에

송곳니 빠진 구멍에 잇몸이 녹아내린 붉은 자리에

한입 뜯긴 사과의 녹물 고인 환부에

 

등을 기대면 휘청거리던 모퉁이 그 숨죽이던 허방에

허방이 매순간 짚던 헛다리에

 

파인 데마다 검지를 댄다 남자들은

아버지의 외투 속에서 낡아가고

 

미래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이 토스트를 사 먹는 거리

쇳조각 조각으로 진눈깨비 내린다

 

손가락 인형들이 말을 건다

아홉 손가락에 실린 쉰 개의 방언으로

녹슬어 부서져가는 혈관 위에서 해전 춤춘다

 

 


 

 

최세라 시인 / 표본

 

 

생각에 꽂힌다 표본판 나비 떼처럼

날개를 접지 않고 앉는 것은 다

표본이다

 

표본판에 서로를 앉힌 채 우린

은빛 침으로 가슴을 찌르곤 했지

 

까만 날개를 찢으며

무작정 걷는다

 

고사리가 나비 주둥이처럼

없는 사람을 자꾸 감아올려서

빽빽이 선 나무들이 두 눈을 찌른다

 

어떤 각도로 돌아서야

나무들은 커튼처럼 열리는가

열려서 우리 살던 집을 보여주는가

 

돌아오지 않는 자의 눈 속으로

사과 한 알 떨어지고

 

나비를 꽂던 은침들이 내 눈 속으로 빗발친다

 

어떤 각도로 돌아서야

찢겨도 피 흐르지 않는 표본이 되는가

 

 


 

 

최세라 시인 / 뜀뛰기 혹은 공중에서의 정지

 

 

  이마의 주름이 무릎에 와요 당신은 근심 어린 눈으로 당신을 생각하죠 바지를 입는 날엔 왜 무릎 뒤가 구겨질까 모래가 강물의 뒤를 밟아 서서히 말려 죽이는 사라스바티 강, 살의가 빛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나나나무와 결혼한 인도 처녀는 잘 살고 있다 해도 기억할 수 있나요 롤 화장지의 나이테만큼 늙은 채 태어난 시각 화성과 금성 사이 몇 개의 혜성이 지나갔는지 나는 몇시 몇 분이었는지 깨물린 자국 패랭이꽃으로 피어난 손목이 세 개의 주저흔을 숨겨준다 말한다면

 

  약병 옆의 꽃들이 자꾸 수면제를 먹어요

  벤치에 앉지 못하는 나무에게 무릎이 필요한 거죠

 

  도시의 키가 여덟 뼘쯤 낮아졌어요 가로수에 일제히 무릎이 생기는 꿈, 쭈그려 앉아 손가락 그림 그렸죠 걸레질하던 무릎으로 기도하다 낭심을 가격한 죄로 파티마 성당까지 기어가야 했던 여자들을 꿈을

 

  스프링처럼 일으켜 세우려는 엄마와 종일 싸웠어요

  시간 서비스를 주지 않는 노래방 주인처럼

  반향어가 난무하는 날에는

  낭자하게 흐르고 싶어요 눈밭에 엎지른

  토마토 주스, 무릎 없는 새들이 그저 뜀을 뛰네요

  허공에 방점들이 박혔다가 그대로 멈춰요

 

  명시하기 힘든 것을 선전하는 벽, 얼굴이 모래처럼 흩어지는 날 실물 크기 아이돌 가수의 스티로폼 손을 잡아요 나쁜 사건은 하나도 쓰지 않은 일기장처럼 당신이 떠나고 있어요

 

 


 

최세라 시인

서울 출생. 1995년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1년 《시와  반시》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