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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휘민 시인 / 접대의 기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8.

휘민 시인 / 접대의 기술

 

 

회식은 시작됐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지글거리는 불판 위에서 허옇게 뒤집히는 살점들

안주 집을 새도 없이 바삐 돌아가는 술잔

 

안주가 떨어지자 하나 둘 가면을 벗기 시작한다

꾸벅꾸벅 졸음을 삼키며 묵언수행 중인 정 과장

쉴 새 없이 문자를 날리던 방 주임은 삼십육계 줄행랑

눈치 없는 허 대리만 물 만난 고기처럼 주유천하

술고래 사장은 직원들 낯빛 살피며 독야청청

 

절반은 남았고 절반은 빈 자리다

이제 영원한 구원투수 김 차장이 나설 때

징징거리는 아내의 목소리 따윈 과감히 꺼버렸다

곧바로 사장 앞에 무릎을 낮춰 파테르 자세 들어간다

 

빈정거리는 사장의 태클을 요령 있게 차단하는 센스

아랫사람들의 투정을 가볍게 원샷으로 틀어막는 막강 입심

자기 집 전화번호야 잊든 말든 사장을 위해

콜택시 호출번호를 줄줄 꿰고 있는 신통방통 기억력

접대부 뺨치는 저 흥행보증수표를 믿어볼 일이다

 

 


 

 

휘민 시인 / 3분 30초

 

 

골든타임에 뉴스를 진행하는 그가

나에게 3분 30초를 배당해 주었다

내 눈은 원고와 녹음실 밖 전자시계를 갈마든다

그래, 이쯤에서 1분이 지나고

여기를 읽을 땐 2분 30초,

저런, 길어지겠는 걸

그때부터 내 목소리는 조금 빨라진다

그러나 누구도 눈치 채선 안 되지

3분 30초, 31초, 32초… 36초.

 

데스크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건네면 그뿐

그러나 이 짧은 시간을 위해 나는 일주일을 바쳤다

주말이면 일간지 북 섹션을 훑고 서점에 나가 책을 골랐다

환승역을 놓친 것도 모른 채 책장을 넘겼고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밤새 원고를 썼다

 

원고를 쓰면서 몇 번이나 분량을 확인했다

모자라거나 넘치면 안 돼

가끔 욕심을 내서 원고가 길어지면

내 목소리는 여지없이 잘려나갔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야금야금 늘어가는

15초짜리 상업광고였다

 

 


 

 

휘민 시인 / 기차 소리를 듣던 밤

 

 

나는 물 속 같은 잠에서 깨어나

첨벙첨벙 세상으로 걸어나왔네

그날따라 별들은 앞다투어 담을 넘어왔고

처마 끝에 고여 있던 달빛은 빈 마당에 흩어져

내 방을 기웃거리는 별들과

밤이 깊도록 수런거렸네

 

창문을 열자 미끄러지듯 뒷걸음치는 어둠

잠들었던 역마살을 깨우며 밤을 건너는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 들렸네

창 틈으로 밀려드는 오월,

그 어느 수상한 새벽의 바람 소리

 

나 살금살금 문지방을 넘어섰네

그때, 안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갈라진 기침 소리

돌아보니 내 치마 한 자락

문설주에 끼어 있었네

 

 


 

 

휘민 시인 / 병상에서 본 별자리

 

 

병상의 하루가 간이침대에서 갈무리될 무렵

잠들지 않는 도시의 불빛 아래 촛불 하나 밝힌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 꿇고 난생처음 두 손을 모은다

흐려지는 불빛 사이로 맑은 수액처럼 떨어지는 링거액

별도 아닌 네온 빛 덩어리들 피어올라

도시의 별자리 더욱 아득하게 멀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밤만 되면 소란스러웠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나 잡히는 기억 한 자락이

매일 밤 아버지의 잠꼬대에 끌려 나왔다

열여섯에 집 나가 소식 끊어진 큰아버지를 부르고

베갯맡에 침 고이는 줄도 모르고 음식을 드셨다

재 너머 따비밭에서 놓쳐버린 소를 찾아

신새벽까지 비탈에 서 계셨다

 

고삐 풀고 달아난 소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 있을까

함초롬히 이슬 맞고 그 커다란 눈에 어리는

새벽별 질근질근 되새김질하고 있을까

아버지가 이랑 깊은 봄의 별자리를

녹슨 보습으로 갈아엎는 밤

기저귀에 젖어든 아버지의 고단한 하루는

달무리 진 하늘 아래서 밤새 뒤척였다

 

가로등이 꺼지는 새벽녘에야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별이 떠오를까 두려웠다

 

 


 

 

휘민 시인 / 부레를 가진 사람

 

 

설익은 추억의 두물머리 헤매다

새벽까지 잠을 놓치는 날

그런 밤이면 세월을 물질하며 강을

거슬러 오르는 당신이 보여요

이마에 맺힌 땀방울로 하루해를 닦아도

문갑 속엔 입술연지 감춰둔 마디 굵은 손

자식들 생일날이라야 고등어 푸른 등

쓰다듬던 그 야윈 손

 

나는 지금 자반고등어 한 토막 앞에 놓고

노릇노릇 구워진 등줄기 걷어내요

하얀 속살처럼 떨어져 나온 당신의 비밀

주둥이 긴 염소처럼 되새김질해요

 

뾰족해진 입으로 풍선을 불어볼까

새들의 푸른 입김 사려 넣어

둥둥 하늘로 떠오르고 싶어

그런데 말랑말랑한 살점 속에서

울컥 울컥 핏물이 배어나네요

 

내 안에 살아 있는

슬픈 어족

당신이 던진 서늘한 작살

내 푸른 등줄기에 꽂혔어요

 

 


 

휘민 시인

본명 박옥순. 1974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청주과학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 시집으로 『생일 꽃바구니』,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가 있고, 동화집 『할머니는 축구선수』와 그림책 『빨간 모자의 숲』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