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원 시인 /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일
접붙이기를 하자 산사나무에 사과나무 들이듯 귤나무에 탱자 들이듯 당신 속에 나를 데칼코마니로 마주 보기 말고 간을 심장을 나누어 갖자 하나의 눈동자로 하늘을 보자 당신 날 외면하지 않는다면 상처에 상처를 맞대고 서로 멍드는 일 아니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일 그러나 맞물리지 않는 우리의 생장점 서로 부르지 않는 부름켜 살덩이가 썩어 가는 이종 이식 꼭 부둥켜안은 채 무럭무럭 자라난다, 우리는 뇌 속의 종양처럼
강기원 시인 / 밤의 욕조
가슴뿐이다 가슴이 텅 빈 내가 누워 있다 출렁거림도 없이 출렁이며 널 담아 가득 찼던 더없이 뿌듯했던 가슴이 이제 홀로 누워 있다 혼곤한 꿈인 듯 내 안에 잠시 머물던 네가 망상을 떨쳐 버리듯 서슴없이 날 빠져나갈 때 무엇으로 널 다시 주저앉힐 수 있었겠나 내 안의 열기는 식어 가고 주글주글해진 네 영혼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너 묵은 때 벗기듯 슬슬 지워 낼 것이다 따뜻했던 물의 기억을 내가 내게서 조금씩 빠져나간다 검은 배꼽 비틀어 나는 나를 소진시킨다 흉곽에 남은 너의 흔적 닦을 생각도 없이 내 안의 마지막 물 한 방울 사라지며 지르는 눌린 비명 소리 홀로 듣는 밤이다 너의 형상대로 움푹 들어간 채 텅 비어 버린 내가
강기원 시인 / 바다로 가득 찬 책*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가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魚) 지느러미
*라니 마에스트로(Lani Maestro)의 사진집 제목.
강기원 시인 / 위대한 암컷
한때 그녀는 명소였다
살아 있는 침묵 하늘을 낳고 별을 낳고 금을 낳는 신화였으므로 범람하는 강이며 넘치지 않는 바다 벗 없어도 당당한 다산성이었으므로 바람의 발원지 바람을 채우는 골짜기 제왕도 들어오면 죽어야 나가는 무자비한 아름다움이었으므로 요람이며 무덤 영혼의 불구를 치유하는 성소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었으므로 만물을 삼키고 뱉어내는 소용돌이의 블랙홀 곡신(穀神), 위대한 암컷이여
여전히 그녀는 명소다 수많은 자들의 탐험이 있었으나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은밀한 문
강기원 시인 / 달거리가 끝난 봄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근거리는 자궁이 되는 거야 중년의 처녀막 기꺼이 찢어 내고 아지랑이의 젖물 뽀얗게 채우는 거야 부푼 아기집 속에 내가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거야, 무럭무럭 자라는 거야 비늘로, 날개로, 메아리로, 그림자로, 천둥으로.....
혼자서도 울리는 북이 되는 거야 급 화살 같은 햇살에 골반을 파고드는 소소리바람에 물고기의 혼인색에 위아래 뻥 뚫린 모자라 자꾸자꾸 숭숭 구멍 뚫리는 거야
그물코 없는 그물이 되는 거야 무엇이 걸리고 무엇이 빠져나가든 내버려 두는 거야, 이 봄엔
강기원 시인 / 베이글 만들기
나의 얼굴, 팔, 다리, 심장을 대접하겠습니다.
늑골의 강력분 땀과 눈물의 소금기 숨결 효모 수줍은 미소의 당분 약간 칠 할인 체액을
뽑아 반죽한 뒤 바닥에 세게 내려쳐 주십시오. 오장 육부 속에 자욱이 들어찬 업의 가스, 한 번으로 빠질 리 없으니 이차 발효 공정이 필요합니다 미농지처럼 얇고 투명해질 때까지 고작 반죽 덩어리인 나를 당신 마음에 들도록 성형하십시오. (이때도 끊임없이 내 몸을 때려 여분의 집념을 몰아내야 합니다)
환골탈태의 과정이 끝났다고 해서 그대에게 갈 수는 없습니다 예열된 오븐의 열기가 내 혼 깊은 곳까지 고루 스며야 하니까요 노릇하고 바삭하게 구워진 나
그래도 아직은 아닙니다 이때쯤 적당히 식혀 주십시오 너무 뜨거우면 피의 시럽 뿌릴 수 없으니 당신의 목이 멜 터이니
무뚝뚝한 껍질 뒤에 숨긴 무향(無香)의 다감한 속살 이제 그대만을 위하여 내어 드립니다 기꺼이
강기원 시인 / 피어싱
아홉 개의 구멍이 모자랐어요 부패한 내장의 밍크 고래가 폭발하듯 나를 폭파시킬 수 있었다면 그리했을 거예요
콧방울, 혓바닥, 유두, 배꼽, 은밀한 그곳까지 바벨의 뇌관을 박는 거지요 하늘에, 땅에, 당신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는 대신
거추장스러운 몸뚱이에 거추장스러움을 더하는 일 (부정의 부정을 하면 긍정이라 당신이 말했지요, 이상한 문법)
무엇이든 뚫고 싶었어요 답답한 도시, 답답한 공기, 답답한 사랑, 답답한 당신들......
갈라진 혀로 조금씩 조금씩 피 흘리며 껌 씹기, 침 뱉기, 사탕 빨기, 키스하기...... 짜릿한 아픔이 퍼질 때마다 살아 있는 나를 느끼는 거죠
반짝이며, 잘랑이며, 아슬아슬하게 팽팽해져 이 거리를 활보할 거예요 부딪히는 것마다 터뜨릴 거예요 지루한 건 참을 수 없거든요
뚫어 보실래요, 당신
강기원 시인 / 비눗방울
짐 설커스는 사망 후 2년 만에 자신의 아파트에서 미라로 발견되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복용하던 다량의 약물이 시신의 부패를 막았던 것이다. 정부에서 받는 장애 연금은 인터넷을 통해 은행 계좌에 자동 입금됐고 전기, 전화, 텔레비전 시청료 등은 인터넷을 통해 자동 지불되었다. 사이버 공산 속에서 그는 공과금을 꼬박꼬박 지불하는 착실한 망령으로 2년 동안 살아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체취 없이도, 손길 없어도 난 당신과 황홀한 섹스를 하지 배신할리 없고 병들 리 없는 늙지 않을 애인 클릭 한 번이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얻을 수 있어 흑마법사, 연금술사, 궁수, 도둑, 왕..... 수없이 많은 내가 많은 얘기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블로그 속 내 방은 마법의 양탄자 북극과 열대 사이, 대서양과 지중해를 순식간에 횡단하지 사라진 도도새와 놀다가 마이아사우루스의 등에 올라타기도 해 친구? 이름? 쓸데없는 일 클릭 한 번이면 그 뿐 비눗방울 속의 세상, 중력 없는 백색 가루의 세상 그러나 판타지도 때론 지루해지는 법 그런 날이면 충직한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가벼이, 방울이 터지듯 사라지는 거야 없었던 나인 채로 물론 악취도 소음도 없이.....
강기원 시인 / 뭉게구름
당연, 달콤했죠 말랑거렸구요 보드라왔어요 발라낼 것도, 씹을 것도 없이 한아름이었는데 환상적이게 끈적했는데 눈앞을 다 가렸는데 무언가 먹긴 먹었는데......
이상하죠 왜 자꾸 배가 고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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