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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형철 시인 / 나의 여름은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8.

황형철 시인 / 나의 여름은

 

 

나의 여름은 개울을 건너는

느린 걸음의 양떼구름쯤으로 기록하고 싶네

 

투명한 방 칸을 무상으로 얻었으니

말간 얼굴과 손발을 하고

두근두근 어에게 가닿으려 하네

 

저마다의 가슴속에

나비처럼 꽃밥을 활짝 열어주고선

소설이나 들추면서 딴청 피우려네

 

밋밋할 수 있는 소묘에

닭의장풀이 피어 푸름을 더하고

 

오랜만에 찾아온 곤줄박이가

구름 속에서 물을 꺼내 마시면

까만 부리와 선한  눈망울만 담으려네

 

개울에 머물거나 구름이 품었던

뭇 생명의 숨결과 무늬

 

개울과 구름의 아득한 사이를 지나간

밤낮의 고요를

 

세상 가장 명징한 모습으로 새기려네

 

그런 후에야 내 일과도 끝나는 것이어서

양떼를 몰고 이제 어디로 가느냐

누군가 물어오면

여름내 쓴 미문 몇 장 대신 건네고 싶네

그렇게 또 한 계절이 지날 수 있으면 좋겠네

 

<시산맥>2019.여름

 

 


 

 

황형철 시인 / 전말

 

 

모름지기 나무는

일순 온 몸을 칭칭 감는 햇살을 그늘로 엮는 재간을 가져야 한다 천둥과 번개의 격한 심사를 헤아리고 바람의 장단이나 고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수많은 벌레의 기거를 들어주고 간밤에 내려앉은 별들의 형상을 새기는 것은 물론 쌀알처럼 나리는 눈마저 맨살로 안아야 한다 시시로 찾아오는 나비나 쇠박새의 전언도 잊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아무런 호명도 없는 저녁의 쓸쓸함과 통절한 상처들이 든든한 하중이 되어야 하는 것

 

짐짓 열매는 뿌리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이것들이 고르게 배합되어 녹아들어야 하는 것

시상(詩想)이라도 몇 줄 얻어 볼 참으로

열매가 맺기까지의 전말을 추적하다가

둥글게 영글고야마는 열매 속에

삼라만상이 들어 있어 흠칫 놀라고서야

모사라도 해둘까 궁리를 하는 오후

 

- 2014년 <시와 정신> 겨울호

 

 


 

 

황형철 시인 / 새의 노래

 

 

새는 노래를 불러본지 오래다

아침햇살은 새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길가의 은행나무는 술렁술렁 잎을 떨칠 뿐

푸른빛을 띤 적도 없고

지리한 하루를 보내는 동안

두통의 주기만 짧아졌다

군살이 낀 날갯죽지 때문인지

가만히 있어도 늘 삭신은 느른해

거울에 튕겨 나오는 라디오를 듣고서야

나절을 가늠할 수 있었다

간혹 느리게 유리문이 열릴 때면

탐스러운 바깥 풍경들이 주책없이 밀려와

잠잠하던 조류사 안이 울렁거릴 뿐

아무도 새의 노래를 찾지 않았다

늘씬한 오선지 위를 껑충거리는

상상으로 자위하는 동안

밖에서는 기호에 맞게

수런대는 새들이 쏟아져

버젓이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황형철 시인 / 산수유꽃 피는 마을

 

 

나비 날고 벌도 찾지만

겨울은 가시지 않아

춘분 지난 지리산은

이마에 흰 눈 가득 얹고 있다

지난해 붉은 열매

알알이 타오르던 열기가

여태껏 남아

뒤늦게 발동이 걸렸나보다

상춘객들로 부산한 골목길을 돌아내리자

일제히 나무에 젖이 도는지

부르르,

부, 르, 르,

마을 전체가 몸을 떨더니

망울 하나 둘 활짝 피어나

꽃 그림자가 깊다

옛 것들에 기대어

무량하게 핀 산수유꽃을 바라보며

온갖 작은 것들도

접을 붙이는지

아지랑이 속에서 나부대는

봄날이다

 

 


 

 

황형철 시인 / 호수

 

 

새들은 아예 먼 산으로 날아갔고

푸르청청 나무숲을 집어삼킨 서슬만

이력을 숨긴 채 주인 행세를 했다

해마다 구름처럼 장하게 꽃 피우던 흰배롱 나무

오갈 든 이파리가 호숫가를 배회할 때마다

바닥은 흉흉하게 갈라졌다

화살 땡볕에 하얗게 말라죽은

몇 마리 물고기의 구멍난 눈 속으로

파리떼만 오그르르, 들락거렸다

그 많던 고기떼는 다 어디로 갔을까

뻘 속에 시린 발목을 묻은 채

고깃배는 자꾸만 밭은기침을 쏟아냈다

꼿꼿한 갈잎이 파랑 많은 호수의 어깨를

추문하듯 쓸어내는 동안

둔중한 걸음의 고라니만 하릴없이 기웃거렸다

앙칼진 바람이 주술처럼 한바탕 쏟아져내리자

잔뜩 짓무른 상처가 무심히 드러나

만수의 싯푸른 기억 더욱 희미해졌다

무엇이 이 지리한 가뭄을 이길 것인가

눈썹달 따라 호수를 건널 일이 아찔했다

 

 


 

 

황형철 시인 / 꽃이 온다

 

 

꽃이 간다 고천암호 가창오리 떼처럼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더니 파열도 없이 단숨에 스스로를 마감하는 정점이다 태반을 놓아버린 꽃이 나무 곁에 머문 잠깐의 인연을 생각하는 동안…에도 꽃은 장례도 없이 간다 중유(中有)의 때도 없이 한 방울 눈물도 없이 간다 모의한 듯 능청맞게 가는 뒷모습에 꽃의 속살 겹겹이 만져진다 가만가만 그 속 들여다보니 나무가 견딘 날들이 애처로이 서 있다 살얼음을 건너온 발걸음이 울고 있다 눈바람 거친 운율에 가득해진 생채기 틈으로 다만 햇빛에 실려 온 뭇 것들이 바삐 드나든다

 

꽃은 나무의 열(熱)이다

가지의 탄력을 받아 훌쩍 날갯짓을 하고 싶었으나

묵묵한 소요만 자서처럼 붉게 남았다

꽃들아, 꽃들아 네 심연에 나를 묻는다

동박새 한 줌 열을 물은 채 날아가 앉은 자리에서

꽃이 온다

 

 


 

 

황형철 시인 / 숲

 

 

다리 위를,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는 사람들. 누군가는 사람들은 건널 수 없는 강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강을 건너면 짐승들의 숲속 도시가 있다고 전설처럼 전한다.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대부분 익숙한 횡단법으로 숲속 도시를 찾아 강을 건넌다. 숲속 도시? 강을 건너면 나무나 풀보다는 철갑을 두른 짐승들 세차게 떼지어 밀려온다. 포효하는 짐승들의 몸 안에 하나 둘 갇혀 유영하는 사람들. 용광로 같은 오색 불빛이 숲속 도시마다 욱신거린다. 누군가는 이 빛을 팔아 졸부가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이 빛을 맨 주먹으로 뺏기도 한다. 교차로에 이르면 더욱 흉흉한 소문들 한바탕 소용돌이친다. 짐승들의 물결에 치인 사람들의 으깨진 심장이 거리마다 덩그랗게 널브러져 있다. 독한 심장들만이 짐승들처럼 포효하며 살아남는다

 

철갑의 짐승들이 떼를 지어 관통하는 거리에는 언제나 검게 말라붙은 핏자욱들 여기저기 뻣뻣하게 달라붙어 있다. 밤이 되면 날카로운 경적소리와 불빛들의 실루엣이 거리를 더욱 출렁이는 협곡으로 만든다.

 

강 건너 저쪽 숲속 도시? 위험한 강가를 타고 기어오르는 보도블럭들. 사람들에게 횡단은 죽음을 담보로 한 아득한 수행이다. 넘치는 짐승들 속에서 사람들은 알거나 모르거나 고단한 도를 닦는다. 범람하는 강물에 도시의 숲은 점점 사라지고 숲을 찾아 이웃나라로 이주했다는 먼 나라의 뉴스가 전해지기도 한다. 길을 헤매다 머지않아 돌아오는 사람들,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숲의 이야기를 파는 사람들, 숲에 관한 점성술로 희망을 사는 사람들의 뉴스......, 모두 강을 사이에 두고 분주하게 오간다. 철갑의 짐승들 마구 질주하는 이 도시에서 숲을 본 사람은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저마다 나무 한 그루씩 안고 살아간다.

환하게 동터오는 숲은 어디인가. 환하게 노래하고 싶은 사람들.

 

 


 

 

황형철 시인 / 숲 2

 

 

굵직한 네 발을 허우적대며

한동안 꺼이꺼이 울었지만

잘 벼린 칼날처럼

고요가 울음을 잘라먹고

달은 차 기울고 있었다

가끔 다른 짐승들의 소리에 허정거릴 뿐

달빛 휘영청

으깨진 몸뚱어리의 선명한 뼈대 사이로

바람이 불 때마다

휘이 휘 피리 소리가 났지만

그것은 순전히 어둠의 소유였다

...네게 말 한 마디 부치지 못하고

부랑한 시절들이 잔뜩 젖은 눈매로 스멀댔다

좀 더 세상을 흠모하려 했지만 온통 연적 뿐이었지

나직이 불러본 이름이 서걱거리며 흩어졌다...

가랑가랑 숨기는 자꾸 약해져 갔고

간간이 무거운 눈꺼풀만 깜빡거렸다

양기를 불어넣는 씀바귀

수혈하는 나무들 피안(彼岸) 삼아

한 마리 짐승이 슬피

사라져간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형철 시인

1975년 전북 진안 출생.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9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의 당선, 계간 [시평]을 통해 등단. 현재 계간 『시와사람』 편집장과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광주MBC에 재직하고 있다. 시집 <바람의 겨를>, <사이도 좋게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