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민 시인 / 접대의 기술
회식은 시작됐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지글거리는 불판 위에서 허옇게 뒤집히는 살점들 안주 집을 새도 없이 바삐 돌아가는 술잔
안주가 떨어지자 하나 둘 가면을 벗기 시작한다 꾸벅꾸벅 졸음을 삼키며 묵언수행 중인 정 과장 쉴 새 없이 문자를 날리던 방 주임은 삼십육계 줄행랑 눈치 없는 허 대리만 물 만난 고기처럼 주유천하 술고래 사장은 직원들 낯빛 살피며 독야청청
절반은 남았고 절반은 빈 자리다 이제 영원한 구원투수 김 차장이 나설 때 징징거리는 아내의 목소리 따윈 과감히 꺼버렸다 곧바로 사장 앞에 무릎을 낮춰 파테르 자세 들어간다
빈정거리는 사장의 태클을 요령 있게 차단하는 센스 아랫사람들의 투정을 가볍게 원샷으로 틀어막는 막강 입심 자기 집 전화번호야 잊든 말든 사장을 위해 콜택시 호출번호를 줄줄 꿰고 있는 신통방통 기억력 접대부 뺨치는 저 흥행보증수표를 믿어볼 일이다
휘민 시인 / 3분 30초
골든타임에 뉴스를 진행하는 그가 나에게 3분 30초를 배당해 주었다 내 눈은 원고와 녹음실 밖 전자시계를 갈마든다 그래, 이쯤에서 1분이 지나고 여기를 읽을 땐 2분 30초, 저런, 길어지겠는 걸 그때부터 내 목소리는 조금 빨라진다 그러나 누구도 눈치 채선 안 되지 3분 30초, 31초, 32초… 36초.
데스크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건네면 그뿐 그러나 이 짧은 시간을 위해 나는 일주일을 바쳤다 주말이면 일간지 북 섹션을 훑고 서점에 나가 책을 골랐다 환승역을 놓친 것도 모른 채 책장을 넘겼고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밤새 원고를 썼다
원고를 쓰면서 몇 번이나 분량을 확인했다 모자라거나 넘치면 안 돼 가끔 욕심을 내서 원고가 길어지면 내 목소리는 여지없이 잘려나갔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야금야금 늘어가는 15초짜리 상업광고였다
휘민 시인 / 기차 소리를 듣던 밤
나는 물 속 같은 잠에서 깨어나 첨벙첨벙 세상으로 걸어나왔네 그날따라 별들은 앞다투어 담을 넘어왔고 처마 끝에 고여 있던 달빛은 빈 마당에 흩어져 내 방을 기웃거리는 별들과 밤이 깊도록 수런거렸네
창문을 열자 미끄러지듯 뒷걸음치는 어둠 잠들었던 역마살을 깨우며 밤을 건너는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 들렸네 창 틈으로 밀려드는 오월, 그 어느 수상한 새벽의 바람 소리
나 살금살금 문지방을 넘어섰네 그때, 안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갈라진 기침 소리 돌아보니 내 치마 한 자락 문설주에 끼어 있었네
휘민 시인 / 병상에서 본 별자리
병상의 하루가 간이침대에서 갈무리될 무렵 잠들지 않는 도시의 불빛 아래 촛불 하나 밝힌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 꿇고 난생처음 두 손을 모은다 흐려지는 불빛 사이로 맑은 수액처럼 떨어지는 링거액 별도 아닌 네온 빛 덩어리들 피어올라 도시의 별자리 더욱 아득하게 멀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밤만 되면 소란스러웠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나 잡히는 기억 한 자락이 매일 밤 아버지의 잠꼬대에 끌려 나왔다 열여섯에 집 나가 소식 끊어진 큰아버지를 부르고 베갯맡에 침 고이는 줄도 모르고 음식을 드셨다 재 너머 따비밭에서 놓쳐버린 소를 찾아 신새벽까지 비탈에 서 계셨다
고삐 풀고 달아난 소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 있을까 함초롬히 이슬 맞고 그 커다란 눈에 어리는 새벽별 질근질근 되새김질하고 있을까 아버지가 이랑 깊은 봄의 별자리를 녹슨 보습으로 갈아엎는 밤 기저귀에 젖어든 아버지의 고단한 하루는 달무리 진 하늘 아래서 밤새 뒤척였다
가로등이 꺼지는 새벽녘에야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별이 떠오를까 두려웠다
휘민 시인 / 부레를 가진 사람
설익은 추억의 두물머리 헤매다 새벽까지 잠을 놓치는 날 그런 밤이면 세월을 물질하며 강을 거슬러 오르는 당신이 보여요 이마에 맺힌 땀방울로 하루해를 닦아도 문갑 속엔 입술연지 감춰둔 마디 굵은 손 자식들 생일날이라야 고등어 푸른 등 쓰다듬던 그 야윈 손
나는 지금 자반고등어 한 토막 앞에 놓고 노릇노릇 구워진 등줄기 걷어내요 하얀 속살처럼 떨어져 나온 당신의 비밀 주둥이 긴 염소처럼 되새김질해요
뾰족해진 입으로 풍선을 불어볼까 새들의 푸른 입김 사려 넣어 둥둥 하늘로 떠오르고 싶어 그런데 말랑말랑한 살점 속에서 울컥 울컥 핏물이 배어나네요
내 안에 살아 있는 슬픈 어족 당신이 던진 서늘한 작살 내 푸른 등줄기에 꽂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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