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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혜경 시인 /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7.

황혜경 시인 /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우리의 친구가 밤길을 건너다가 죽었고

뒤로 너의 애인이 죽었고

 

이사 간 자매가 와서 새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두고 간다

배달된 것들을 찾으러 오겠다고 한다

배달된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오래 그 집에서 1학년이었고

 

(............)

벌레를 떼어내듯이

놀아난 기분

 

아침도 없이 또 시간 가운데

 

새들이 왔다

 

소리가 먼저 와서 알 수 있었다

그날의 새는 앵두나무에

있었다

저요 저요

 

나도 있었다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황혜경 시인 / 비켜서다

- 사람이 사람을 초월하면 자연이 된다*

 

 

등을 돌리고 잔다는 말보다

엉덩이를 마주하고 잔다고 말하자

 

너의 바나나는 몇 개니 나의 바나나는 10개야

듬성듬성 누군가 떼어먹은 다발에서

빠진 바나나의 숫자만 셀 때는 보이지 않는다

바나나 꽃과 바나나의 시간 같은 것

 

세 근이던 딸기가 네 근이 되는

밤 9시의 시장 같은 것

 

흥정하지 않아도

 

고령의 이웃은

자는 시간보다 깨어있는 시간이 길다 하고

자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보다 길다 하는

나는

불쑥, 문을 당기고 말

철렁, 하는 것들 앞에서

잘 닫히지 않는 화장실 문을 붙잡고 변기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는데

같은 이름을 가진 잘 모르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한 발자국 물러나

접착된 편집偏執의 한쪽 끝이 떨어지는 걸 보았다

 

까발릴수록 드러나지 않는 것들은

더 오므리는 힘을 안에서 키우고 있으려니 그러려니 하고

매일 정확하게 들고 나는 문들도 무기가 되는 날이 있고

긴박한 상황에도 느슨해지는 순간이 있었느니

나는 더 일찍 이 말을 했어야 했다 나에게

준비된 게 없어서 시작될 게 없었지만

완성하지 못해서 결정할 수 없었지만

물러서는 사람이라서 기다리고 있다고

 

발버둥이 끝나지 않는 자리에서 맴돌고 있던 때에는

말들이 가장 앞서 있었으나 달콤한 말들은 말뿐이었으니

보물 지도를 혀에 숨겨둔 소녀처럼

가끔 한마디씩 하면서

향하여 찾아가듯 출렁이면서

믈결이 될 때까지

 

유서가 아름다워질 때까지

 

비켜서다

 

조금도 가볍지 않다가 조금 더 가볍다

 

(*부제목 - 최승자의 시「서서히 말들이 없어진다」

『물 위에 씌어진』, 천년의 시작, 2016)에서)

 

 


 

황혜경 시인

1973년 인천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2010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느낌 氏가 오고 있다』(문학과지성사, 2013),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