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만 시인 / 도서관
사막이 직립해 있는 곳엔 가지 마세요 수천만 페이지 모래바람 펄럭이는 구릉, 낙타처럼 걸어가는 독서는 젊음을 화르르 쏟아놓곤 해요 거기 어디선가 별들이 소곤대지만 제 귀는 사르르 스쳐가는소리만 읽어요 사막을 횡단한 사람도 첫발을 디딘 사람도 똑같이 발을 헛디뎌요 무너지기 좋을 만큼 발밑으로 바람이 흘러요 길이 있다는 말 듣고 길 따라 흘러간 사람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요 갈증이 깊어지면 모래가 물이 되는 사막엔 가지 마세요 은하수가 불모의 강이라고 읽기 싫어요 낙타가 되긴 싫어요 아버진 오래 전부터 모래였어요 바람뿐인 아버지를 낙타라고 읽긴 정말 싫어요
사막으로 출근하고 사막으로 퇴근하는 사람들이 발견한 아버지, 수천만 페이지의 사막을 다 건넌 사람은 없어요 사막을 횡단하다 사막이 되어버린 아버지, 아버질 펼치면 오아시스에서 별 헤고 있는 어머니, 스스스 미끄러지기만 하는 어머닌 언제부터 유사의 강이었나요
바람을 만나야 길을 얻는 모래에게 바람은 낙타란다 낙타의 등에 올라타렴 모래처럼 스스스 달려보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안이니 타박타박 낙타처럼 걸어가는 활자들, 길 잃으러 사막 간다 길 버리러 사막 간다
권기만 시인 / 인간 이후
시간을 늘여 스스로 죽음에 들지 않는 한 죽지 않는 인간족이 탄생했다
페가수스좌에서 반짝 눈을 뜬 농염한 미래의 기척
자숨에서 이주해 온 인간들이 아미달라 행성에 내리던 날
인간의 걸음걸이 거기 어디에도 나이는 없다
한번도 보지 못한 이방인을 보는 눈빛에 지구인이라는 고대문자는 보이지 않았다
우주인으로 거듭나는 동안 용맹무쌍한 인간은 그 오랜 죽음의 존엄을 슬프게도 잊었다
연약한 첫발이 가진 연민으로 반짝이는 지구 푸름을 영원성으로 만든 땀의 유전자만이 온전한 지구인을 살아가고 있다는데
사건의 지평선 위로 행성 이주족들이 거대한 비행체를 몰고 지나간다
나이를 지운 인간으로 아미달라 행성에 내리던 날 빛을 가린 무리에 행성의 하루가 종일 컴컴했다
권기만 시인 / 행성기록자 1
작약이 화색을 꾸미다 놀라 미소를 봉긋으로 바꾼
우주, 물고기 자리, 고래자리 복합 초은하단,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처녀자리 초은하단, 국부은하군, 은하수 준은하군, 우리은하, 오리온 팔, 굴드 대, 국부 거품, 국부 성간구름, 태양계, 내행성계, 지구, 아시아 대륙, 동아시아, 대한민국, 울산, 북구, 약수*
100조개의 별이 살고 있는 우주, 10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 100조개의 미생물이 살고 있는 미생물 연합군 연방정부에 불과한 나
초속 600km로 우주공간을 질주하는 지구에 소속된 몸의 총량에 137억 광년을 더하면 우주의 생물연대가 된다 빅뱅 이후가 오롯이 관통한 짧은 생각으로 영생을 깨우친 푸름
46억 2020년 숙성된 인간이 걸어간다 숙성에서 동격인 개와 닭을 지나 문지방 너머 할머니 열여덟을 지나간다 문틈으로 시간의 허리가 짧다 무료를 하품하다 눈 마주친 고양이 재빨리 달의 분화구 속으로 꼬리를 감춘
*우주명 주소
'05 문학저널 신인상 당선작 권기만 시인 / 찬 밥
언제 저렇게 많은 알을 슬어 놓았을까
식탁 위 고들고들한 밥 형광등 불빛 오밀조밀 들어앉아 금세라도 깨어날 듯이 꼬물거린다 말간 빛의 알갱이 한 숟갈 떠 입에 넣는다 생의 막장마저 물어뜯는 것일까 공복의 창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요동친다 찬밥 한 덩이로 버티기엔 너무 먼 하루 가다가다 어깨 처진 그믐 같은 슬픔, 한번 더 불어터지고 있다
식탁 위, 섬처럼 떠 있는 밥그릇 살갗도 대지 않고 언제 저랗게 많은 허기를 고봉으로 낳았을까 삭발한 희망 한 덩이로 웅크린 반달 갱도를 비추는 흐린 램프 같다 어디든 막장이라고 자꾸 안전모를 눌러쓴다
몇 번의 굴절을 더 거쳐야 더운밥 둘러앉아 먹을 수 있을까 막삽 같은 숟가락으로 눈물을 캔다 한때 물컹했던 기억 갱차에 퍼담는 반지하 거실 어깨 처진 슬픔, 한번 더 불어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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