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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인수 시인 / 묵호 등대오름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9.

문인수 시인 / 묵호 등대오름길

 

 

묵호등대에서 턱 아래 묵호항까지 걸어서 내려와 봤다.

벼랑에 숨은 테라스, 혀를 내민 그 무수한 집들이 온통

한 쪽 벽면을 차지한 거대한 약장 같다. 저 숱한 부리,

서랍 마다엔 물론 또렷또렷한 인생이 들어있을 것이다.

 

삶은 결국 삶으로써 낫겠지만 저 까마득한 바닥,

나는 이제 못 올라가겠다.

 

사람의 가파른 골목길을 빗물이 먼저 몰려 씻어 놨다.

 

항구에 내려와 올려다보니, 갈매기들 모두 날개가 있다.

묵호등대, 묵호 씨

 

묵호의 꼭대기가 이 등대의 좌대이다. 두루뭉수리,

편하게 앉은 채여서 더 오래 먼 데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다가와 등대의 펑퍼짐한 둘레를 도는데

그것이 가파른 턱 아래 항구의 비린내를 잣아 올린 힘이 됐을까,

좌선의 목 주름살이 깊다.

 

등대는 아시다시피 어둠으로써 눈뜬다.

 

이 등대는 사람들의 낮은 키가 좋은지 구태여 삐죽하게 일어서지 않는다.

그렇듯 앞뒤 없이 곁을 내어주는 듯해 길을 잘 모르는 나는,

나는 그저 묵호, 묵호 씨라 부르고 싶은 것이다.

 

 


 

 

문인수 시인 / 해저의 골목들

 

 

부산의 감천항 바닷가 산동네, 감천문화마을 골목들은 물고기들이 인도하는 길이다.

 

골목 모퉁이마다 예쁘게 그려놓은 한 떼의 열대어들을 따라가면 동네 한 바퀴 부드럽게 돌아 나올 수 있는데

 

화살이 겨누는 저기가 아니라 말미, 꼬리지느러미의 힘이 그려대는 저기인 것이다.

 

열대어들이 도란도란 이 동네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그렇듯 무수히 물방울을 씹으나 물먹지는 않고

좁아터진 골목길, 이 가파른 협곡이며 그 벼랑을 물렁물렁하게 지나

 

집에 들어간 이들의 목물이 피땀 씻는 일이 아니라 열대야의 뒷물이기도 할 것이다.

 

(포엠포엠, 2012년 여름호)

 

 


 

 

문인수 시인 / 등고선 골목들

 

 

부산의 감천동문화마을을 도는 층층 골목길들은 높낮이가 없다.

오르막 내리막 없이 구불구불 동네 속으로 파고드는데,

어느 집에선가 부기- 우기-, 기타 소리가 애절하게 흘러나온다.

기타의 울림통, 그 해면체 같은 둘레를 한 바퀴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골목길들은 휘어지는 것인데

저 바다 수평선을 내려다보는 이 동네, 그 바닥은 참 고르다. 가파른 산비탈의 집들은 그렇듯

피망 썬 것 같은 겹겹의 해발을 다져딛고 서서

감천항 바다, 뱃고동 소리를 여러 계단 허리에 감고 또 감는다.

 

(포엠포엠, 2012년 여름호)

 

 


 

문인수 시인(1945-2021)

1945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중퇴. 1985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늪이 늪에 젖듯이』(심상, 1986)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문학아카데미, 1990) 『뿔』(민음사, 1992) 『홰치는 산』(만인사, 1999) 『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배꼽』(창비, 2008) 이 있음. 1985년 심상 신인상. 1996년 제14회 대구문학상, 2000년  제11회 김달진문학상, 2003년 제3회 노작문학상, 2007년 제7회 미당문학상 수상. 2007년 제10회 가톨릭문학상. 2016년. 동리목월문학상 목월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