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 시인 / 묵호 등대오름길
묵호등대에서 턱 아래 묵호항까지 걸어서 내려와 봤다. 벼랑에 숨은 테라스, 혀를 내민 그 무수한 집들이 온통 한 쪽 벽면을 차지한 거대한 약장 같다. 저 숱한 부리, 서랍 마다엔 물론 또렷또렷한 인생이 들어있을 것이다.
삶은 결국 삶으로써 낫겠지만 저 까마득한 바닥, 나는 이제 못 올라가겠다.
사람의 가파른 골목길을 빗물이 먼저 몰려 씻어 놨다.
항구에 내려와 올려다보니, 갈매기들 모두 날개가 있다. 묵호등대, 묵호 씨
묵호의 꼭대기가 이 등대의 좌대이다. 두루뭉수리, 편하게 앉은 채여서 더 오래 먼 데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다가와 등대의 펑퍼짐한 둘레를 도는데 그것이 가파른 턱 아래 항구의 비린내를 잣아 올린 힘이 됐을까, 좌선의 목 주름살이 깊다.
등대는 아시다시피 어둠으로써 눈뜬다.
이 등대는 사람들의 낮은 키가 좋은지 구태여 삐죽하게 일어서지 않는다. 그렇듯 앞뒤 없이 곁을 내어주는 듯해 길을 잘 모르는 나는, 나는 그저 묵호, 묵호 씨라 부르고 싶은 것이다.
문인수 시인 / 해저의 골목들
부산의 감천항 바닷가 산동네, 감천문화마을 골목들은 물고기들이 인도하는 길이다.
골목 모퉁이마다 예쁘게 그려놓은 한 떼의 열대어들을 따라가면 동네 한 바퀴 부드럽게 돌아 나올 수 있는데
화살이 겨누는 저기가 아니라 말미, 꼬리지느러미의 힘이 그려대는 저기인 것이다.
열대어들이 도란도란 이 동네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그렇듯 무수히 물방울을 씹으나 물먹지는 않고 좁아터진 골목길, 이 가파른 협곡이며 그 벼랑을 물렁물렁하게 지나
집에 들어간 이들의 목물이 피땀 씻는 일이 아니라 열대야의 뒷물이기도 할 것이다.
(포엠포엠, 2012년 여름호)
문인수 시인 / 등고선 골목들
부산의 감천동문화마을을 도는 층층 골목길들은 높낮이가 없다. 오르막 내리막 없이 구불구불 동네 속으로 파고드는데, 어느 집에선가 부기- 우기-, 기타 소리가 애절하게 흘러나온다. 기타의 울림통, 그 해면체 같은 둘레를 한 바퀴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골목길들은 휘어지는 것인데 저 바다 수평선을 내려다보는 이 동네, 그 바닥은 참 고르다. 가파른 산비탈의 집들은 그렇듯 피망 썬 것 같은 겹겹의 해발을 다져딛고 서서 감천항 바다, 뱃고동 소리를 여러 계단 허리에 감고 또 감는다.
(포엠포엠, 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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