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숙 시인 / 발목의 지향점
그대를 보내고 나는 휘청거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평평한 땅에서 접질리는 왼발은 절망한 심장 쪽으로 자꾸 드러눕고 발등의 멍이 푸른 바다처럼 시퍼렇게 밀물로 들어와 나는 관절 가득 얼음주머니를 얹고 북극을 체험했습니다
처방은 거짓말 진술에 의존합니다 무리한 여행을 다녀왔을 뿐이라고 당신을 둘러댔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몇 번은 해봤을 것 같은 의사의 안경 너머를 주시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자세와 습관 때문이군요
명쾌한 처방입니다 당신이 빠진 산책길에서 왼편의 결핍을 발목은 먼저 알아차리고 방황했나 봅니다 배롱나무 가지처럼 촉감 좋던 그대의 팔목에 팔짱 끼던 습관대로 헛헛한 허공에 팔을 걸다 기우뚱 넘어진 일은 예고된 발목의 저항이었습니다
발목은 심장처럼 뜨겁진 않지만, 지향점은 다섯 발가락 오직 한 곳, 그대를 향하고만 있었습니다.
시집 『허풍쟁이의 하품』 2020. 시산맥
고경숙 시인 / 공기놀이
단단한 바위인 줄만 알았었는데 산산이 풍화돼 공기알 다섯 개로 그는 내 손바닥에 남았다 꽃 같은 이름 부르며 공중으로 하나 던지고 나머지 네 알 에피소드는 가을 대지에 흩뿌렸다 한 알씩 천천히 집고 다시 그 이름, 바람 위로 던졌다 이번엔 행복했던 순간과 눈물로 두 개씩 갈라 집었다 유리파편 같은 이름 구름까지 힘껏 던지며 돌아보니 그가 잘해준 것 세 개와 내가 준 상처 하나 생각났다 서둘러 공기알을 집는다 다신 부르지 않겠노라! 마지막 공기알을 던진 맹세다. 공깃돌 움켜쥔 주먹 안에서 계절이 여러 번 바뀌고, 모든 과정을 거친 뒤 가는 단계, 손바닥에 모은 다섯 공기알 조심스레 공중으로 던지고 내려오는 사이, 잽싸게 손바닥을 뒤집어 손등으로 받으며 손목을 휘감아 잡는 것 그게‘꺾기’다! 다섯 알 다 꺾으면 5년, 심드렁한 나도 함께 꺾어버렸다
나는 유난히 작은 손 탓에 손등에서 공기알 주르르 흐르거나 꺾다 튕겨나가기 일쑤여서 다른 이들보다 정해놓은 세월을 채우기가 늘 더뎠다
그를 잃은 시간은 순간이었는데 그를 잊는 시간은 억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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