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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길나 시인 / 파도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9.

김길나 시인 / 파도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바다가 벽에 걸려 있다

정지된 바다에 일출이 켜지자 바다가

고대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벽에서는 파도소리가 났다

안일한 일상의 평면을 걷어내는 파도가

바다 속 깊이를 읽어내는 음률을 달고 굽이친다

햇덩이를 해산하고 흘린 핏물이 벽 안으로 스민다

갇힌 사유, 갇힌 시선, 갇힌 언어가 해의 태반을 삼키고

바다로 나와 노래 부른다. 바다였던 벽, 벽이었던 바다를-

마침내, 산란의 혼인띠를 몸에 감은 여자가 파도를 건너 뛰어

바다로 나온 뒤, 언어의 알들이 수초에 깔리고

육화한 은빛 멸치떼가 집어등 아래로 몰려온다

물에서 나온 그것들, 반짝반짝 튀어 오르며

퍼덕인다. 맥동하는 행렬과 탈출 사이에서 바람이

인다. 배열이 소용돌이치고 행렬이 바뀐다

바다는 거기 있고 종일 파도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집집의 봉창, 그 액자에 담긴 따순 불빛을 지나

눈 내리는 어촌 마을에서 새들이 돌아오고 있다

 

 


 

 

김길나 시인 / 불타는 얼음*

 

 

깊은 곳까지 지하계단을 내려가면

수만 년이 저장된 냉동고가 있다

냉동고 안에 익룡의 날개, 날개에 얹힌 구름이

얼어 있다. 삼엽충을 비추던 별빛이 얼어 있다

빙하기에 얼어버린 그대 눈물이 번쩍거린다

생의 빙점이 삼켜버린 그대 외길이 굳어져 번들거린다

조각난 생의 단애가 빙벽이 다 되어 미끄럽다

누가 성냥을 그어 얼음에게 던진다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얼려진 불 한 줌

너울거린다. 꽁꽁 언 그대 만년 고독은 불꽃이었으므로

얼음묘지의 비문을 열고 그대 사랑이 타오른다

불타는 얼음은 몇 생의 전생을 담아둔 그대의 타임캡슐인 게야

누가 물결무늬 층층이 감춰놓은 불꽃을 꺼내든다

그리고 땅 위의 얼음과 땅 밑의 얼음을 양 손에 쥐고

한 손엔 물을, 또 한 손엔 불을 흘리고 있다

 

그대가 내민 손이 섬뜩하도록 차다

열정의 유전을 감춘 냉정은 무섭다

 

*땅이나 깊은 바다의 고압 저온 상태에서 천연가스와 물이 결합돼 만들어진, 드라이아이스와 비슷한 고체가스인 이 하이드레이트는 불을 붙이면 타는 성질이 있다.

 

 


 

 

김길나 시인 / 그녀의 집은 조용하다

 

 

   월요일은 일요일

   창문이 굳게 닫힌 화요일의 아침 해장국이 뜨겁다

   출퇴근길을 멈춘 수요일의 구두는 얼룩졌고

   목요일의 옷걸이에 걸린 아이의 분홍 조끼,

   그 위에 실직한 넥타이가 꼬부라져 있다

   금요일의 찢어진 벽지에서 너덜거리는 것은

   꽃, 그리고 안개

   토요일의 화장대 앞에서 그녀는 한결

   단단해진 벽을 피부에 두껍게 바른다

   목쉰 그녀의 머리칼이 쭈삣, 위로 뻗치는

   ㅏㅑ, ㅏㅑ 반편의 신음소리

   먹구름묵사발에 듬뿍 고추장 얹어 밥을 비벼 삼키는

   그녀의 매운 눈물은 벽 속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요일의 그녀의 집은 귀로는 조용하다

   허공에서 까치가 월드아파트 108동 701호를 통과해

   급강하하고 사선으로 상승한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밀어 올린 태양은 아직

   기울지 않고 그녀의 창을 조명하고 있다

   그 빛이 왜 눈부실까?

 

 


 

 

김길나 시인 / 잘려나간 길

 

 

그는 발에서 붕대를 풀어낸다 발에 감긴 길이 줄줄이 풀린다 지나온 발자국이 나열되고 발밑에서 모래가 쓸려나온다 거기, 마른 낙타 한 마리 쿵, 퍼질러 앉는다 어깨가 기울고 허리가 꺾인 각은 굽은 길에서 왔으나, 굽은 길 모서리에 채인 발이 덧나 꽃빛으로 붉게 물들었으나, 그 굽은 길에서 우렁우렁 우는 낙타의 울음이 발등에 얹혀 상처에 눈물이 스미기도 했으나

 

그의 병은 달았다 밖으로 끌어내야 돼, 그는 달디 단 피 속에 스멀거리는 죽은 애인의 눈웃음을 꺼내 발가락에 꽂았다 만져줘 만져줘 그의 손을 잡아당기는 죽은 애인의 목소리는 점점 자지러들었다 발에서 살의 발효를 모의하는 곰팡이들의 추상화에 섞여 그 눈웃음은 금시 검붉어졌다 지독한 무감각이 발등을 넘었다

 

그런 날은 술이 넘치는 달 항아리를 열고 그 속으로 잠겨들었다 달이 그를 꿀꺽 삼켰다 달 속에서 그의 방광이 팽팽히 부풀고 달물이 고인 그의 오줌은 달았다 그는 캄캄한 눈을 손가락으로 후벼 팠다 그의 몸에서 마지막 선인장의 꽃모가지 뚝 떨어지는 소리가 달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는 죽은 낙타를 빗물 아래 묻고 가위를 들었다 발에서 풀어낸 길을 싹둑싹둑 잘라내 버렸다 기어이 다리가 절단된 것이다 바람벽에 걸려 대롱거리는 다리를 까닭 없이 밝은 햇살이 어루만지고 있다 발 없는 발치에 누가 갖다놓았을까 치자꽃 한 송이.

 

 


 

 

김길나 시인 / 0時

ㅡ찰나의 빛

 

 

0時 속에는 보이지 않는

벌레구멍이 있네

0時 넘어 0時로 가는

웜홀을 사이에 두고

두 우주가 맞물려 있네

한 순간이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은

 

그러니까

지구의 문 안팎으로 들고 나는

오는 생

가는 생이

지구별의 0時 속에서

번개처럼 시간을 후리치며

나란히 나열되는

찰나의 빛!

순간, 두 우주가 교차하며

휙! 내 앞을 지나갔다

 

 


 

김길나 시인

1940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 1995년 시집 <새벽 날개>를 상자하면서 시단에 나왔으며, 1996년『문학과사회』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빠지지 않는 반지』(문학과지성사, 1997)와  『둥근 밀떡에 뜨는 해』(문학과지성사, 2003) 와  『홀소리 여행』, 『일탈의 순간』가 있음. 산문집『잃어버린 꽃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