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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상만 시인 / 꽃, 지다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0.

서상만 시인 / 꽃, 지다

 

 

꽃 한번 피운 것이

절명(絶命)의 이유일까

 

몰아치는 밤비에

홍화당혜(紅花唐鞋) 벗어놓고

 

소리 없이 묻히는

귀가 파란 꽃잎들

 

 


 

 

서상만 시인 / 귀향을 생각하니 난감하다

 

 

마음속에 집이 있다 한들

객지 땅에 아내를 묻어두고

훌쩍 혼자 떠나다니,

 

구름도 따라오지 않고

장롱에 붙박인 백동나비도

우두커니 바라만 본다

 

 


 

 

서상만 시인 / 불임의 새

 

 

산다는 길에 생무덤을 파고

수심 깊은 출세 따윈 잊은 지 오래

 

이제는 예수도 부처도 안 믿지만

천국 얘기에는 그래도 귀가 솔깃해

 

개 푼도 없는 시인이라서

가치 따윈 없어진 지 오래

 

돌래돌래 시 몇 줄이 좋아서

끼리끼리 목청 깨다 오는 저녁

 

찾아갈 나무도 둥지도 없어

눈 어두운 신에게 길을 묻는다

 

그래, 벌써 사는 일이 식상해졌다

스치는 사람마다 표정도 없고

번다스런 옷매무새도 그냥 그렇고

가나보다 오나보다 낯선 길에서

부르거나 쫓는 이 없는 새가 되었다

 

죽은 것과 산 것이

돌고 돌아 다시 여기 오기까지

귀 찔린 내 고전은 닳고 닳아,

이런 날은

고요히 유서 같은 속울음만 운다

탄월(彈月)

 

 


 

 

서상만 시인 / 늦귀

 

 

공산(空山)에

나뿐인 줄 알았더니

 

대숲에 짐짓 스민

달빛 따스하다

 

바람에 눈물 털며

속으로만 우는,

 

함께 묻힐 산야에서

나를 부르는

들풀의 울음소리

 

나, 이제 들었다

 

 


 

 

서상만 시인 / 어머니와 나팔꽃

 

 

밤새 끼니 걱정하던 어머니 앞에

새벽부터 나팔꽃은 눈치 없이

활짝 웃고 있었네

 

삼복더위 허기진 대낮,

저도 별 수 없이

시들시들 곤드라져 웃음을 닫아

 

시든 꽃잎 보시고

어머니가 버무린 차운시(차(次韻詩)

한 줄

 

“사람도 속 곯으면 딱 이 모양이지

목말라 죽은 놈은 향기도 없어”.

 

 


 

 

서상만 시인 / 추풍부(秋風賦)

 

 

작은 새는 작은 소리로 울고

큰 새는 큰 소리로 우는

어리중간에서

나는 훔쳐 보았네

잎 저버린 가지에

저마다 무심히 울고 간

새들의 흔적을

 

때없이 뒹구는

잎들의 울음을

 

그래도 나는 모르겠네. 정말

이별은 어떻게 헤어지는 것인지

날아간 새 발자국을 좇으며

얼룩진 가을볕 한 모금

호줄근히 가슴에 묻는 날.

 

 


 

 

서상만 시인 / 잃어버린 시간

 

 

달빛 갈라놓은 분월포(芬月浦) 노두길

성근 왕대울타리 안 병든 아내위해

당신 몸이야 아낌없이 허물던, 막막한

아버지의 부복(俯伏)뿐인 집 한 채

해질 무렵, 멀리 영일만 노을이

울금빛 물결로 넘실넘실

어머니 살 속에 파고들고

아버지 가슴에 피 눈물이 고이던

오월 초이레, 낡은 문설주를 흔들며

저승 돌개바람이 어머니를 빼앗아갔다

그 아스라한 적막의 빈집을, 아버지는

길을 넓히라고 마을에 내주고

끝내 세상을 떠나셨다

훤히 뚫린 길

덧없이 떠나가신, 내 어머니 아버지의

황혼 사랑과 이별

무시로 드나든 겨울바다바람도

조용히 잦아들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길을 찾아 간다

아버지와 꼭 닮은 나의 길

 

 


 

 

서상만 시인 / 아내의 발톱

 

 

한 십 년

내 손으로 아내의 손톱 발톱을 깎아주었다

한 오 년은 힘없어도 겨우겨우

예쁜 손톱을 내밀며 조금은 자신 있게

못생긴 발톱을 내밀며 조금은 부끄럽게

넌지시 미소를 건네주던,

 

그 후 한 오 년은 미소마저 잃어버린 채

맥없이 처져버린 그녀의 손톱 발톱

그 긴긴 날들이 한순간의 꿈같다

그럼 누가

무덤 속에 자란 손톱 발톱을 깎아줄까

어느새 내 슬픔도 이만큼 자랐는데

 

어디쯤 갔을까

이제는 따라가지 못할 이승의 밖

당신과 나는

수억 년을 건너뛴 공간 밖이라는데

 

 


 

 

서상만 시인 / 백동나비 1

 

 

젖은 마음

모처럼 봄볕에 말리고

집에 들어서니

아내의 장롱에 살던 백동나비 한 마리

 

마지막 아내의 손 무게로

사풋이 내 어깨에 날아 앉았다

 

차마 눈짓이라도 되고픈

알 수 없는 파문을 그으며

 

 


 

서상만(徐相萬) 시인

1941년 경북 포항시 호미곶에서 출생.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수학. 고려대 경영대학원 수료.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시간의 사금파리> <그림자를 태우다> <모래알로 울다> <적소> <백동나비>, 동시집 <꼬마 파도의 외출> <너, 정말 까불래?> 등이 있다. 월간문학상, 최계락문학상, 최계락문학상, 포항문학상, 창릉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