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만 시인 / 꽃, 지다
꽃 한번 피운 것이 절명(絶命)의 이유일까
몰아치는 밤비에 홍화당혜(紅花唐鞋) 벗어놓고
소리 없이 묻히는 귀가 파란 꽃잎들
서상만 시인 / 귀향을 생각하니 난감하다
마음속에 집이 있다 한들 객지 땅에 아내를 묻어두고 훌쩍 혼자 떠나다니,
구름도 따라오지 않고 장롱에 붙박인 백동나비도 우두커니 바라만 본다
서상만 시인 / 불임의 새
산다는 길에 생무덤을 파고 수심 깊은 출세 따윈 잊은 지 오래
이제는 예수도 부처도 안 믿지만 천국 얘기에는 그래도 귀가 솔깃해
개 푼도 없는 시인이라서 가치 따윈 없어진 지 오래
돌래돌래 시 몇 줄이 좋아서 끼리끼리 목청 깨다 오는 저녁
찾아갈 나무도 둥지도 없어 눈 어두운 신에게 길을 묻는다
그래, 벌써 사는 일이 식상해졌다 스치는 사람마다 표정도 없고 번다스런 옷매무새도 그냥 그렇고 가나보다 오나보다 낯선 길에서 부르거나 쫓는 이 없는 새가 되었다
죽은 것과 산 것이 돌고 돌아 다시 여기 오기까지 귀 찔린 내 고전은 닳고 닳아, 이런 날은 고요히 유서 같은 속울음만 운다 탄월(彈月)
서상만 시인 / 늦귀
공산(空山)에 나뿐인 줄 알았더니
대숲에 짐짓 스민 달빛 따스하다
바람에 눈물 털며 속으로만 우는,
함께 묻힐 산야에서 나를 부르는 들풀의 울음소리
나, 이제 들었다
서상만 시인 / 어머니와 나팔꽃
밤새 끼니 걱정하던 어머니 앞에 새벽부터 나팔꽃은 눈치 없이 활짝 웃고 있었네
삼복더위 허기진 대낮, 저도 별 수 없이 시들시들 곤드라져 웃음을 닫아
시든 꽃잎 보시고 어머니가 버무린 차운시(차(次韻詩) 한 줄
“사람도 속 곯으면 딱 이 모양이지 목말라 죽은 놈은 향기도 없어”.
서상만 시인 / 추풍부(秋風賦)
작은 새는 작은 소리로 울고 큰 새는 큰 소리로 우는 어리중간에서 나는 훔쳐 보았네 잎 저버린 가지에 저마다 무심히 울고 간 새들의 흔적을
때없이 뒹구는 잎들의 울음을
그래도 나는 모르겠네. 정말 이별은 어떻게 헤어지는 것인지 날아간 새 발자국을 좇으며 얼룩진 가을볕 한 모금 호줄근히 가슴에 묻는 날.
서상만 시인 / 잃어버린 시간
달빛 갈라놓은 분월포(芬月浦) 노두길 성근 왕대울타리 안 병든 아내위해 당신 몸이야 아낌없이 허물던, 막막한 아버지의 부복(俯伏)뿐인 집 한 채 해질 무렵, 멀리 영일만 노을이 울금빛 물결로 넘실넘실 어머니 살 속에 파고들고 아버지 가슴에 피 눈물이 고이던 오월 초이레, 낡은 문설주를 흔들며 저승 돌개바람이 어머니를 빼앗아갔다 그 아스라한 적막의 빈집을, 아버지는 길을 넓히라고 마을에 내주고 끝내 세상을 떠나셨다 훤히 뚫린 길 덧없이 떠나가신, 내 어머니 아버지의 황혼 사랑과 이별 무시로 드나든 겨울바다바람도 조용히 잦아들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길을 찾아 간다 아버지와 꼭 닮은 나의 길
서상만 시인 / 아내의 발톱
한 십 년 내 손으로 아내의 손톱 발톱을 깎아주었다 한 오 년은 힘없어도 겨우겨우 예쁜 손톱을 내밀며 조금은 자신 있게 못생긴 발톱을 내밀며 조금은 부끄럽게 넌지시 미소를 건네주던,
그 후 한 오 년은 미소마저 잃어버린 채 맥없이 처져버린 그녀의 손톱 발톱 그 긴긴 날들이 한순간의 꿈같다 그럼 누가 무덤 속에 자란 손톱 발톱을 깎아줄까 어느새 내 슬픔도 이만큼 자랐는데
어디쯤 갔을까 이제는 따라가지 못할 이승의 밖 당신과 나는 수억 년을 건너뛴 공간 밖이라는데
서상만 시인 / 백동나비 1
젖은 마음 모처럼 봄볕에 말리고 집에 들어서니 아내의 장롱에 살던 백동나비 한 마리
마지막 아내의 손 무게로 사풋이 내 어깨에 날아 앉았다
차마 눈짓이라도 되고픈 알 수 없는 파문을 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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