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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구자 시인 / 지우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0.

신구자 시인 / 지우개

 

 

지금 머리 속에는 지우개 하나

내 보폭만큼 함께 자라나면서 갈잎 갉아 먹듯 사각사각

맛있게 뇌를 갉아 먹고 있는 모양이다

 

그제는 우리 집 기둥 아들 생일을 콩 까먹더니

오늘은 생각만 해도 아롱삼삼한 손녀 생일도,

무수히 꽃피고 꽃 지던 속수무책의 그리움도

봄눈 녹듯 사르르 녹여 버린다

 

멀쩡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다가도

기억의 괄약근이 풀어지면

멍하니 먼 산 돌아서는 구름의 뒷꽁지를 쫓다

개울물에 빠지기도, 발길질 당하기도 한다

 

두렵다

큰길 접어 두고 지름길로 달려오고 있는 것 같은

저 무뢰한의 지우개,

 

살살 꼬드겨 꽃그늘 속에 코 박아

도끼자루 삭아 내리도록 잠재울 수 없을까

돌부리에 걸려 무릎 팍, 꺾이게 할 수 없을까

 

 


 

 

신구자 시인 / 이팝꽃

 

 

서말지 무쇠솥 넘치도록

너실너실 잘 퍼진

 

저 이밥

 

찌들은 가난에

배 곯은 영혼들 위해

뭉실뭉실 한김을

피워 올리고 있는

 

 


 

 

신구자 시인 / 괜찮아

 

 

봄이 와도 오금을 펴지못한 채

옹송거리고 있는 꿈,

고향의 안방처럼 포근하게 품어주는 말,

괜찮아

 

그 누구에게 든든한 언덕이 되려고 노력했는데도

어긋난 돼지발톱처럼 상처를 주고 누를 끼치게 했을 때도

괜찮아,

 

뜨거운 사막 맨발로 걸어온 길들이

한갓 물거품이 되어 고개 꺽었을 때도

안개꽃 같이 둘러리가 되어 위로해 주는 말,

괜찮아

 

모든 걸 다 품어주는 어머니 품속 같은

말랑말랑한 말의 씨앗 괜찮아, 괜찮아,

어깨 다둑여 주는 말, 정말 괜찮아

 

 


 

 

신구자 시인 / 선비고을 나들이 가다가

 

 

도로변에 흐드러지게 흰 쌀밥 한 소쿠리씩 퍼 담고 서 있는

이팝나무를 보다 늘 배가 고파 이슬방울 같은 눈물방울

대롱대롱 매 단 채 노랗게 외꽃 피우던, 베베꼬인 대추나무

한 그루 담벼락에 박혀있던 점쟁이 논실댁 끝분이를 생각하다,

 

찰랑찰랑 물을 채워놓은 논을 보다 천봉답 논뀌 물싸움으로

꼭두새벽부터 고성이 오가던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님을 생각하다,

나무지개 위에 참꽃을 꺽어 수북이 지고와 쑥스러운 듯 고개 외로

꼬은 채 슬며시 마루에 내려놓던, 상주에서 머슴살러 왔던 고봉밥에

부지런했던 박서방을 생각하다,

 

삭발당한 등피 두꺼운 능금나무 곁을 지나다

삼대독자 외며느리 입덧에 하회탈 웃음 귀에 건 채, 겨우 꽃 떨어진

콩알만한 풋살구나무 밑을 맴돌던 등이 굽은 등개할매를 생각하다,

 

검은 히잡을 쓴 채 변신의 날 참고 견디는 인삼밭 보다

봄을 타는 나에게 최고의 명약이라며 사오던 6년근 풍기인삼,

백년해로 약속 어긴 채 푸른 산천 혼자 선경에 던 그를 생각하다,

 

간밤 내린비에 황사먼지 깨끗이 씻은, 푸른 하늘 두둥실 흘러가는

흰 구름 따라가다 산절로 물절로  속절없이 흘러가는

봄날을 생각하다

 

 


 

신구자 시인

1939년, 경북 칠곡 약목 출생. 1994년 『대구문학』 신인상 시 당선. 1999년 『불교문예』 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2005년, 시집 『낫골 가는 길』『지금도 능소화는 피고있을까』출간. 2015년, 시집 『지금도 능소화는 피고 있을까』출간. 2015년,「한민족作家賞」수상. 한민족작가회, 현대불교문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여류문학회, 칠곡문학회 회원. 반짇고리문학회 회장 역임. 대구시인학교 <사림시>, <솔뫼> 동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