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춘 시인 / 단석산에서 -시작 노트
봄 날, K시인이 경주 단석산 산행을 마치고 일행과 하산을 할 때 농담처럼 말했다
-시를 쓰려면 김유신처럼 해야 돼
장군이 단칼에 큰 바위를 쪼개듯
시인이라면 단칼에 시의 정수리를 쪼갤 줄 알아야 돼
시적 영감, 단칼에!
*k시인: 강은교 시인.
김성춘 시인 / 봉래산*
오랜만에 고향 부산에 갔다 회관 9층, 바다내음 물씬 나는 P 시인 사무실 대형 유리창 너머 내 어릴 적 친구 봉래산이 나를 반긴다. 소꿉동무 시절이 납작하게 코 흘리며 떠 온다 불알친구 추억들, 파노라마처럼 떠밀려 온다
영도다리 난간엔, 잠간만 참으시오! 팻말, 문패처럼 서 있고 미군에게 학교를 내어 주고 천막교실 땅바닥에서 공부하는 꼬맹이들 영도에서 서면 종점까지 개똥벌레 차 닮은 전차가 윙윙 달리고 하루 두 번씩 영도다리가 물구나무를 벌떡 섰었지 다리 아래 배들, 갈매기 데불고 그림처럼 지나갔었지 딱지치기 구슬치기에 불알친구들 해 지는 줄 몰랐지
아, 그때 이쁜 갈매기들 어디로 갔나 그때 그 붉은 구슬 같은 단짝 친구들 어디로 갔나 저물녘, 아득히 밀려오는 추억의 영도 그 소년 쩍 푸른 눈썹, 먼 그리움에 잠시 풍덩!
*부산 영도의 산 이름. 일제시대 산 정상에 일본인들이 대못을 박고 정기를 고갈시키려고 ‘고갈산’이라 명하였다. 최근엔 대못도 빼고 본래의 지명인 ‘봉래산’으로 산 이름을 되찾았다. 그러나 아직도 곳곳에 ‘고갈산’이라는 일본인이 붙인 산 이름을 모르고 쓰는 분들이 많다.
김성춘 시인 / 등-막달레나 아바카노비츠에게*
내가 당신의 전시장에 갔을 때 경주 지진 참사 1주년 날이었다 전시장엔 목 없는 사람들이 줄지어 등만 보인 채 앉아 있었다 세상의 꽃은 모두 등이 젖어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 뒤뜰 마네킹 닮은 목 없는 부처들 젖은 등의 사람들 눈물 글썽이며 살고 지진이 왔다 가도 진실은 보이지 않고 어제와 똑같은 길 위의 사람들 죽음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젖은 등만 환했다
젖은 등과 등 사이로 이슬이 왔다 가는 길이 보였다 당신이 사랑하는 섬엔 오늘 밤도 해독하기 어려운 파도소리만 높고 죽음을 오오래 바라보는 목 없는 사람들의 슬픔 젖은 등 사이로 환하게 보였다
* 폴란드 여류 조각가(1930~2017)
김성춘 시인 / 파초 일기 -홀로 있는 청개구리가 아름답다
며칠 전 일이다 집 식구 청와 보살 한 분 밤새 사라졌다가 한로가 지난 오늘 아침 마실 갔다 돌아오듯 다시 왔다 반가웠다 귀여운 손녀 같다 문구멍으로 살며시 들여다보니 백만 불짜리 가을 햇볕 데불고 젖은 몸 말리고 있다 뜨거운 심장 허공과 손잡고 있다 기적 같은 하루가 힘겹다
오, 홀로 있는 청와 보살이 아름답다
가슴이 뛴다 병 깊은 몸이다 기적 같은 하루가 나의 적이다.
김성춘 시인 / 성화(聖畫)
아씨시에 갔다
여기 저기 성당이 참 많았다 지하 성당마다 촛불이 성령처럼 오고 갔다 낡은 의자와 먼지들, 오랜 약속처럼 두터웠다
삶과 죽음은 한 몸일까? 한 몸이 된 예수와 십자가 언덕을 하염없이 오르고 그 뒤를 또 다른 십자가가 된 한 사내가 피 묻은 맨 발로 언덕을 하염없이 오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툭, 툭 끊기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프란치스꼬야! 프란치스꼬야! 내 뒤를 잘 따라 오고 있느냐?
예수가 고개를 돌려 흘낏, 흰 구름을 돌아본다.
*아씨시: 이탈리아에 있는 聖 프란치스꼬의 고향. 프란치스꼬는 완전한 가난 속에 예수와 같은 삶을 산 성자.
김성춘 시인 / 바다
그녀는 눈부신 열 일곱 살 온 몸이 성감대다 갯바람이 살짝 볼을 스치기만해도 몸의 구석구석 관능의 흰 파도가 부끄럽게 부끄럽게 부서지는 그녀는 눈부신 열 일곱 살.
김성춘 시인 / 섬. 비망록. 5 -방어진
세상의 어떤 더러움도 세상의 어떤 힘도 반짝임도 낮은 것은 모두 물이 되는가.
살아가면서 쌓이는 우리의 슬픔도 나의 치욕도 눈물도, 오줌도, 냄새 나는 분비물도 낮은 것은 모두 물로 만나 가장 깨끗한 바다를 이루는가.
누군가 멀리서 굵은 첼로 현을 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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