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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홍준 시인 / 북천-계명지(鷄鳴池)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9.

유홍준 시인 / 북천-계명지(鷄鳴池)

 

 

  닭 울음을

​운다는 저수지가 있어 북천에

​나는 그 저수지 둑 위에 서서 일렁거리는 물비늘을 들여다보네

​작은 돌멩이 두 개를 주워 힘껏 던져본다네

​닭 울음을 운다는

​저수지가 있어

​북천에

​어린 딸의 손을 움켜쥐고

​그 저수지 속으로 걸어 들어간 여자가 있어

​저수지는 푸르고 저수지는 깊고

   저수지는 내가 아무리 돌을 던져도 꿈쩍도 않는 저수지

​사람의 얼굴을 물거울에 비추면 붉은 닭이 어른거린다네

   그 닭 자꾸만 저를 잡으라고 유혹한다네

​닭 울음을 운다는 저수지가 있어

​북천에

​나는 오늘도 그 저수지 한 바퀴를 돌며 생각하네

​죽어도 죽지 않고 저 저수지 바닥에 살고 있는

​북천의 닭

 

 


 

 

유홍준 시인 / 손

 

 

사람이 만지면

새는 그 알을 품지 않는다

 

내 사는 집 뒤란 화살나무에 지은 새집 속 새알 만져보고 알았다 남의 여자 탐하는 것보다

더 큰 부정이 있다는 거, 그걸 알았다

 

더 이상 어미가 품지 않아

썩어가는

알이여

 

강에서 잡은 물고기들도 그랬다

 

내 손이 닿으면 뜨거워

부정이 타

비실비실 죽어갔다 허옇게 배를 까뒤집고 부패해갔다

 

-詩 전문 계간지『포엠포엠 』2020년 가을호

 

 


 

 

유홍준 시인 / 모란

 

 

고향 흙을 담아

꽃을 심는다

 

고향 흙은 푸슬푸슬하다

고향 흙은 자꾸만 어딘가로 가려고 한다

 

내 고향 흙은 마사토, 아무리 뭉쳐도 뭉쳐지지가 않는다

 

일평생 뭉쳐도

내 마음은

도대체 뭉쳐지지를 않는다

 

어떤 꽃을 심어도 내 고향 흙은 붉은 꽃만을 피운다

 

 


 

 

유홍준 시인 / 버드나무집 女子

 

 

버드나무 같다고 했다 어탕국수집 그 여자, 아무 데나 푹 꽂아놓아도 사는 버드나무 같다고…… 노을 강변에 솥을 걸고 어탕국수를 끓일 때, 김이 올라와서 눈이 매워서 솥뚜껑을 들고 고개를 반쯤 뒤로 빼고 시래기를 휘저을 때, 그릇그릇 매운탕을 퍼 담는 여자를, 애 하나 들쳐 업은 여자를, 머릿결이 치렁치렁한 여자를

 

아무 데나 픽 꽂아놓아도 사는

버드나무 같다고

검은 승용차를 몰고 온 사내들은

버드나무를 잘 알고 물고기를 잘 아는 단골처럼

여기저기를 살피고 여자의 뒤태를 훔치고

입 안에 든 어탕국수 민물고기 뼈 몇 점을

상 모서리에 뱉어내곤 했다

 

버드나무, 같다고 했다

 

 


 

 

유홍준 시인 / 짚을 만졌던 느낌

 

 

짚을 만졌던 느낌은

뱀을 만졌던 느낌과는 달라서

차갑지가 않지 매끄럽지가 않지 꺼끌꺼끌하고 까칠까칠하지

 

나를 낳고 동생을 낳고

아버지 대문간에 금줄을 칠 때, 그 새끼를 꼬든 느낌은 어떠했을까

낫으로 발바닥을 깎아도

꿈쩍도 않던 소는, 달구지를 끌던 옛날 옛적 소는

짚으로 만든 그 신발을 신었을 때 감촉이 또 어떠했을까

 

짚을 만졌던 느낌은

옷이나 책이나 그릇을 만졌던 느낌과는 달라서 한참을 달라서

옜다, 너도 한번 꼬아보아라

아직 어린 나에게도 짚 한 단이 던져졌을 때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나의 손바닥은 그것을 싹싹 비벼 꼬았네

요만큼 새끼줄을 꼬면

꼬리처럼 엉덩이 뒤로 밀어내며

동그랗게 사리던 새끼줄의 즐거움을 알았다네

 

짚을 만졌던 느낌은

여자의 몸을 만졌던 느낌과는 달라서

꺼끌꺼끌하고 까칠까칠하고 나는 아직도 그 느낌을 좋아한다네

 

자주 밤길을 오갔던 나는

짚단에 불을 붙이면 어느 만큼 갈 수 있는지 그것까지를 다 알고 있다네

 

겉은 꺼끌꺼끌하고 까칠까칠한 짚의 느낌을

속불은 발갛고 재는 유난히 더 검은 짚의 육체를

 

 


 

 

유홍준 시인 / 들깻잎을 묶으며

 

 

추석 날,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웃음 날려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잎 이파리처럼 부풀고

맞다 맞어, 무슨 할 말 그리 많은지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연거푸 함박웃음을 날린다

어렵다 어려워 말 안해도 빤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로 흰구름 몇 덩이 지나가는 추석 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

아아, 모처럼의 기쁨!

 

 


 

유홍준 시인

1962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1998년 《시와 반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 2005년 한국시인협회 '제1회 젊은 시인상', 2007년 제1회 '시작문학상' 제2회 '이형기 문학상' 제28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현재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에서 사무국장. 순천대 문예창작학과와 동의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강사로 출강. 시집『喪家에 모인 구두들』『나는, 웃는다』『저녁의 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