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참 시인 / 임금님의 요리사와 40인의 도둑
임금님이 포도주 두 병을 비웠을 때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요리사의 며느리는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옷을 짜고 있었습니다 요리사가 구워낸 칠면조가 임금님 식탁에 올라갔을 때 요리사의 아내는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잔치가 있는 이웃집에서 접시를 닦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의 요리사가 창고에서 포도주 병을 꺼내 쌓인 먼지를 닦고 있을 때 감옥에 갇혀있는 노름꾼의 큰아들이 죽었습니다 노름꾼의 큰아들이자 사촌오빠의 사위가 죽은 줄도 모르고 왕비는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술 취한 임금님이 식탁에 엎어져 코를 골고 있을 때 요리사의 막내딸은 아홉 번째 항아리를 열고 뜨거운 기름을 부었습니다 임금님이 잠꼬대를 하고 있을 때 요리사네 옆집에 사는 할머니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항아리 속에 웅크린 채 뜨거운 기름에 데어 죽었습니다 알리바바네 뒷마당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요리사가 휘파람을 불며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 요리사네 옆집 사는 할머니는 아들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고 요리사의 며느리는 골방에 틀어박혀 옷을 짜고 있었습니다
김참 시인 / 도마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자를 따라 사거리 갈빗집에 갑니다 갈빗집 통유리에 회색 도마뱀들이 죽은 나방처럼 붙어 있습니다 마을 청년들은 고기타는 냄새 가득한 갈빗집 밖에서 맨손체조를 합니다 사거리 갈빗집에 앉아 낯익은 사람들이 저녁을 먹습니다 면사포를 벗고 밥을 먹던 여자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고 벌떡 일어납니다 활짝 핀 개나리 덤불이 있는 벽을 따라 뛰어가기 시작합니다 음악에 맞춰 맨손체조를 하던 동네 청년들이 여자를 따라 달리기 시작합니다 여자는 꽃무늬 벽지에 도마뱀들이 붙어있는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를 시작합니다 하얀 사기그릇에 야채스프를 담아 식탁에 올려놓습니다 동네 청년들이 숟가락을 들고 야채스프를 허겁지겁 퍼먹는 동안 도마뱀들은 네모난 식탁에 차려진 둥근 접시들과 접시 옆에 놓인 포크를 밟으며 돌아다닙니다 마을 청년들이 여자의 집에서 아홉시 뉴스를 들으며 녹차를 마시는 동안 천장에 붙어있던 도마뱀들이 식탁 위의 둥근 접시에 떨어집니다 갈비집 주인이 텔레비전을 끕니다 마을 청년과 여자와 도마뱀들이 사라집니다 통유리에 회색 도마뱀들이 죽은 나방처럼 붙어 있는 사거리 갈빗집을 나와 활짝 핀 개나리 덤불 아래를 걸어가는 동안 개나리 덤불에서 뚱뚱한 도마뱀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립니다
김참 시인 / 선물
나는 너에게 물고기를 주고 너는 그에게 꽃나무 화분을 준다 그는 옆집 여자에게 고양이를 주고 그의 옆집 여자는 네거리 꽃집 남자에게 나무인형을 준다 네거리 꽃집 남자는 밤무대 여가수에게 꽃다발을 주고 밤무대 여가수는 옷가게 주인에게 포도주 세 병을 준다 옷가게 주인은 총포상 여주인에게 검은 우산을 주고 총포상 여주인은 K에게 검은 권총을 준다
내가 너에게 어항을 주면 너는 그에게 물고기를 주고 그가 옆집 여자에게 꽃나무 화분을 주면 그의 옆집 여자는 네거리 꽃집 남자에게 고양이를 준다 네거리 꽃집 남자가 밤무대 여가수에게 나무인형을 주면 밤무대 여가수는 옷가게 주인에게 꽃다발을 주고 옷가게 주인이 총포상 여주인에게 포도주 두 병을 주면 총포상 여주인은 K에게 검은 우산을 준다
어느 비 오는 오후 나는 K를 만난다 검은 우산 쓴 K가 나에게 권총 한 자루를 준다 나는 권총을 들고 너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너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그에게 전화를 한다 그는 옆집 여자에게 그의 옆집 여자는 네거리 꽃집 남자에게 네거리 꽃집 남자는 밤무대 여가수에게 밤무대 여가수는 옷가게 주인에게 옷가게 주인은 총포상 여주인에게 총포상 여주인은 K에게 전화를 한다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K와 함께 너의 집 앞에 있는 나에게 다가온다 검은 권총을 빼앗는다 나는 수갑을 차고 비 내리는 철물점과 어둠이 내리는 네거리 꽃집을 지나 경찰서로 끌려간다 검은 쇠창살 안에 갇힌다
김참 시인 / 사라진 집
자고 일어나니 집이 없어졌다 집을 찾으러 정신없이 돌아다녔지만 어디에도 집은 없었다 놀이터에 앉아 모래를 팠다 모래 속에서 잃어버렸던 진공관 라디오가 나왔고 라디오 밑에서 첫사랑의 흑백사진도 나왔지만 아무리 모래를 파도 사라진 집은 찾을 수 없었다
한참 모래를 파자 녹슨 철문이 나왔다 철문 안에는 빨간 맨드라미 핀 작은 집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함께 살던 가족들이 밥상 앞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철문을 열어젖히고 나오니 집 밖은 사막이었다 선인장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사막에는 둥근 비행접시가 있었다 비행접시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은 삽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나도 삽을 들고 땅을 팠지만 아무리 땅을 파도 사라진 집을 찾을 수는 없었다
김참 시인 / 사막을 달리는
김참 씨가 쓰는 시에는 사막이 나오고 낡은 자동차와 검은 망토 걸친 여자가 나오고 자동차 타고 사막을 달리는 김참 씨가 나온다 아니다 김참 씨가 탄 것은 자동차가 아니다 그가 탄 것은 사막을 달리는 늙은 타조다 아니다 타조를 탄 사람은 김참 씨가 아니라 검은 망토 걸친 여자들이다 아니다 훔친 타조를 탄 김참 씨가 사막을 여행하다가 달리는 자동차에 탄 여자들과 장거리 경주를 한 것이다 아니다 김참 씨가 탄 자동차는 달린 것이 아니다 그의 자동차는 사막에 갑자기 나타난 신기루 앞에서 고장으로 멈춰 서있다 아니다 자동차가 서있는 곳은 검은 선인장들이 끝없이 늘어선 오아시스 마을 어두운 숲속이다 아니다 이마에 뿔 달린 거인들이 묻힌 오래된 모래무덤 앞이다 아니다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있는 강변의 하얀 모래밭이다 아니다 햄버거 가게와 약국이 보이는 사거리 횡단보도 근처에서 뚫린 구멍을 통해 벽돌집 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 검은 벽 앞이다 아니다 검은 벽 앞에 멈춘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늙은 타조다 검은 망토 걸친 여자들이 타조 위에 김참 씨를 태우고 사막의 오아시스 옆을 지나가다가 뿔 달린 거인들이 앉아 있는 벽 앞에 멈춘 것이다 아니다 타조가 멈춘 곳은 벽 앞이 아니다 선인장 숲에 버려진 낡아빠진 자동차에 멍하니 앉아 열린 창문으로 선인장 숲을 바라보는 김참 씨의 낡은 자동차 옆이다 아니다 기찻길과 도로가 교차하는 화장품가게 앞에서 귤과 사과를 파는 좌판 옆이다 아니다 김참 씨는 지금 시를 쓰고 있는 중이다 김참 씨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책상 앞에 앉아 사막에 관한 시를 쓰고 있다 김참 씨는 시를 쓰다 말고 김참 씨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이것 보시오 김참 씨! 정말 답답해 죽겠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를 쓰고 있어야 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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