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선 시인 / 개가 물어뜯은 시집
우편으로 배달된 시집을 옆집 개가 물어뜯고 있다 제목은 찢겨져 나갔고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다 시 제목이 반쯤 남아 땅 위에 너덜거린다
한 끼에 9000원 짜리 독상
침 흘리고 먹다 버린 첫 장 시인의 말이 마당에 흩어져 있다 귀퉁이 구겨진 시인의 얼굴은 웃는다 시집을 먹어치운 개가 맛을 아는지 양지 바른 마당에 앉아 꼬리를 흔든다
배불리 먹었을까
씹어 넘기다가 맛있는 부위만 골라 핥았을까 유명한 견이니 겉장만 보고 가려서 맛보았겠지 간신히 찾아낸 이름 한 글자와 제목이 대문 앞에 적멸처럼 앉아있었다*
조경선 시인 / 컵
옆에 놓여 있는 컵이 하나여서 다행입니다 나도 그 감정이어서 다행입니다 둥글다는 것은 입술을 편하게 하고 일정하게 맛 들여진 곡선의 촉감들은 손끝으로 읽어 주고 싶어집니다 뜨거운 차를 수십 번 입에 댔다 떼는 사이 외풍이 옆자리를 떠올리다 스스로 식어지곤 해요 양손을 떠받힌 사기그릇이 처음부터 뜨겁지는 않아요 홀로 급하게 먹어 치우는 점심이 갈증을 불러와도 한 번에 들이키면 기억까지 데이고 말죠 매번 불투명한 속에 얼굴을 채워도 내 얼굴은 투명하게 보이지 않아요 살다보면 컵 속의 가라앉은 자들이 얼굴을 내밀지요 뜨겁고 차갑고 쓰고 달착지근한 입김들이 바닥에 엎드려 눌러 붙어 있습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컵 밑은 이유 없는 생채기로 흔들렸어요 컵하고 발음하고 나면 상처도 저 혼자 아물 것 같아 매일 순한 밤 속에 정갈하게 엎어놓지요 그래서인지 문양이 새겨진 바깥쪽이 자꾸만 청승맞은 빛이 되어 나를 봅니다 컵 하나만 기다려줘서 다행입니다 외로움을 마시지 않습니다 고요를 마십니다
조경선 시인 / 오래된 가방
조용한 암자 뒷벽에 가죽 가방이 걸려 있다 끌에 걸리어 살을 내주고 박음질은 터져 나갔다 때로는 쇳덩이처럼 무거웠을 연장들 그의 어깨에서 나뭇결이 움직인다 산사는 어둠을 세워 날을 닦아 품에 넣는다 가방은 칼을 움켜쥔 채 풍경 소리 쓸어 담는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진규 시인 / 율여집(律呂集) 1 외 4편 (0) | 2021.10.09 |
---|---|
고성만 시인 / 인형을 뽑는다 외 1편 (0) | 2021.10.09 |
강미영 시인 / 빠가사리* 외 1편 (0) | 2021.10.08 |
홍진기 시인 / 저녁 산책 외 5편 (0) | 2021.10.08 |
강미영 시인 / 시인 (0) | 2021.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