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인 / 율여집(律呂集) 1 -조선 채송화 한 송이
소리의 속살들이 보인다 날아가는 화살들만이 아니라 되돌아 다시 오는 화살 떼들이 보인다 한 몸으로 보인다 너와 나의 운동엔 순서가 따로 없다 사랑의 운행엔 시간이 따로 없어서 거기 다 있다 그러나 肥滿이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너와 나 사이를 빼곡빼곡 다져 쟁이는 빛의 超速들, 긋고 간 흔적이 없다 빛은 세상에서 가장 날렵하다 <쇠도끼 갈고 갈아 담금질 얼음 담금질 살로 빚은 金剛>*, 제 혼자서도 날아가는 날아오는 빛의 도둑 떼들이여, 햇살들이여, 해 뜨는 이 아침 자옥하구나 鳴滴을 듣는다 살 섞는 소리를 듣는다 마악 피어난 작은 조선 채송화 한 송이가 찰나라고 일러야 하느냐 언제 제 혼자 피어 저리 세상에 빼곡빼곡 쟁여 있느냐
*雪嶽 五鉉 스님 尋牛頌 次韻.
정진규 시인 / 율여집(律呂集) 2 -밥을 멕이다*
어둠이 밤새 아침에게 밥을 멕이고 이슬들이 새벽 잔디밭에 밥을 멕이고 있다 연일 저 양귀비 꽃밭엔 누가 꽃밥을 저토록 간 맞추어 멕이고 있는 겔까 우리 집 괘종 붕알시계에게 밥을 주는, 멕이는 일이 매일 아침 어릴 적 나의 일과였던 生家에 와서 다시 매일 아침 우리 집 식구들 조반을 챙기는 그러한 일로 하루를 열게 되었다 강아지에게도 밥을 멕이고 마당의 수련들 물항아리에도 물을 채우고 뒤꼍 상추, 고추들 눈에 뜨이게 자라 오르는 고요의 틈서리에도 봄철 내내 밥을 멕였다 물밥을 말아주었다
*멕이다 : ‘먹이다’의 안성 사투리. *(改稿)
정진규 시인 / 율여집(律呂集) 3 -마르게 웃는
물 듣는 빨간 고무장갑을 빼면서 겨울 뜨락에서 나를 맞는 제수씨, 제수씨처럼 마르게 웃는 슬픔을 나는 안다 흐르다 멈추고 멈추었다 다시 흐르는 강물 끊긴 자리에 허리 꺾인 마른 갈대를 나는 안다 칼국수를 미는 제수씨의 홍두깨가 어느새 구겨진 슬픔을 밀고 있다 里長 볼 때, 아우가 타고 다녔던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아직도 헛간에 기대어 서 있다 구르지 않는 슬픔을 나는 안다
정진규 시인 / 율여집(律呂集) 4 -달빛 방식
보름살이떼*를 만나러, 몸으로 만나러 한 여자의 바다가 곰소만으로 간다 달의 시간을 아는 가장 정밀한 시계를 모든 물고기들과 여자들은 한 개씩 차고 있다 달은 힘이 세다 달빛 밧줄 바다를 끌어당긴다 갯벌에 가면 조개껍데기에 달의 시간이 달의 금줄이 깊게 패어 있다 조금 때는 짧고 사리 때는 길다 사리와 조금의 달빛 당기기, 달빛 방식으로 사랑을 끌고 당기면 실패가 없다 가장 둥근 사랑을 성취할 수 있다 가득 채울 수 있다 7, 8월 보름달이 뜨면 크리스마스섬으로 가라 달의 명령을 따르는 홍게, 대게들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직방 전진! 우르르 바다를 향해 암컷들 군단으로 알 뿜어댄다 떼로 몸 푼다 12월의 바다는 여름에 달궈진 온기가 남아 있다 멍게의 번식기, 12월 보름 암수한몸인 물멍게들은 5만개의 알들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땅속의 물들도 보름달이 당겨 올린다 수세미와 고로쇠도 달의 직속들이다 불임의 여자에게 귀띔해 드리러 보여드리러 곰소만으로 간다 달빛 방식으로 해라 실패가 없을 것이다
*‘보름살이떼’ : 未堂.
정진규 시인 / 율여집(律呂集) 5 -토용 떼와 찔레꽃
다 상관이 있다 천리만리라지만 그게 아닌 것을 오늘 또 본다 중국 섬서성 진시황능 속의 전사 土俑들이, 토용 떼들이 내 꿈길마다 웅기중기 막아서고, 연전 화양동 계곡에 가서 노박이로 젖었던 찔레꽃 향내가 무슨 상관으로 이 봄에 내 몸속에서 한 몸으로 뒹구는 것일까 옆구리로 삐어져나와 세상을 집적거리기도 한다 오염되어 돌아가기도 한다 천리만리 살 속까지 속속들이 당기고 있는 저것들을 규명하려 들지 말자 건너갈 다리는 이쪽에서 가다가 홀연 없어지고 저쪽에서 오다가 홀연 없어지기도 한다 그 홀연을 규명하자 홀연이 가장 강력하며 위대하다 모든 것은 단번에 홀연 交合이다 겨울밤 겨울밭에서 마늘 싹이 돋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무리는 위대하다 홀연이다 내가 임신중절한 것들, 싹이 돋기를 포기한 씨앗들 천리만리로 홀연 되돌아갔을까 홀연 몸을 바꾸었을 따름이다 律呂의 子宮 속으로 그저 아득히 着陸하고 있다
*律呂 : 우주 生成의 리듬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12律로 나누고 이를 다시 陽의 소리에 속하는 六律과 陰의 소리에 속하는 六呂로 나누어 말한다. 陰陽이 만나는 生命의 리듬, 그 실체들의 몸짓이 빼곡하게 차 있는 秘儀의 공간으로 나의 시가 運行을 시작했다. 『禮記』에 ‘正律和其聲’이라 한 대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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