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시인 / 위로 떨어지는 사람
넌 키 작은 4번일 뿐이야 4번 타자는 좋지만 4번은 나쁜 것, 첫 번째 앞줄 발각되기 좋은 자리, 분필 가루 먹기 좋은 자리, 안경도 없이 준비물도 없이
‘새나라’‘새마을’‘새엄마’‘새아빠’의 ‘새’는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니까 자꾸 ‘새아들’이 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철봉이 네게 4교시 끝나고 했던 말, 넌 이제 그만 매달렸으면 좋겠다, 태어날 때부터 4번
대롱대롱이라는 말은 결코 위로가 되지 않아, 아래로 머리를 향한 채 쏠림의 방식을 즐기는 수밖에
구름 사이로 장딴지들이 지나갈 때 물이 오른 계집애들의 치맛자락은 늘 황홀했지, 휘파람을 부는 수밖에
그냥 4번을 끝내고 싶지만, 다리를 풀고 완전히 떠나고 싶지만 관심사는 오직 떨어진 후에 다가올 비웃음
노을 속으로 한 방울 한 방울씩 뒤틀린 생각들이 빠져나갔지, 너무 일찍 판단 중지된 세상, 정수리가 닫히고 있었지 꿈의 성장판과 함께, 담임이 다가왔지 4번 이 자식, 10분 더 추가!
하린,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20~21쪽
하린 시인 / 슬리퍼
뒤꿈치의 안부는 결심 이후의 결말일 테니 배웅보다는 마중에 어울리지 맨발을 얹고 날아다니는 보드 옥상 위에 남겨지면 우주선 강물에 한 짝만 떠밀려오면 난파선 절대 달리면 안 되지 벗겨지고 미끄러지고 발목이 삐고 병원에 가면 또 다른 슬리퍼를 착용할 테니 발바닥만 기억하는 감정만 하나 더 늘어나지
이것은 자신감이 붙게 하는 가벼움 ‘동네’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장면 화창한 날 명랑한 날 억울한 날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날 생각에 잔뜩 먹구름 낀 날 비 오는 날 비가 그친 날 가리지 않고 출몰하는 실내가 실외가 되고 실외가 다시 실례가 되는 학교든 학원이든 자주 출몰해서 끼리끼리 모이기 좋은 껌 좀 씹었던 사람이나 안 씹었던 사람이나 다 같이 삐딱한 말 삐딱한 표정 삐딱한 자세와 함께 애인보다는 친구에게 다가가고 싶은
골목 안쪽 서성거림이거나 담배꽁초 쌓인 고시텔 입구 흡연구역이거나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서리를 맞는 마지막 방향이거나
수식이 필요 없는 여름을 뛰어넘는 계절감 가장 이물 없는 걸음걸이를 위한 당신의 심플라이프
계간 시 전문지 《POSITION》 2020년 가을호
하린 시인 / 딸기 우유의 기분
나는 딸기를 오해하고 어머니는 우유를 이해한다
처음부터 섞이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와 어른이 섞여서 어른아이가 되거나 아이어른이 되는 일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불완전한 상태인 게 없다
그 많던 씨들의 가능성은 어디로 갔나요 어머니, ‘진짜딸기우유’ 속에는 딸기의 심장과 맥박과 숨소리가 있을 것만 같은데 진짜란 무엇을 위한 기억인가요
유통기한이 지나도 싱싱함을 보장하는 건 냉장고의 배려 혹은 음모 어머니는 알츠하이머의 원산지를 걱정했어야 했다
먹지도 버리지도 않고 쌓아 놓은 딸기 우유를 내게 내미는 습관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딸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순하고 연한 빨강이 으깨지는 상상만 떠오르는데, 우유 속에서 딸기가 걸어 나와야 니 애비 속에서 여자가 걸어 나와야 온갖 편린들이 섞여 어머니의 지금을 증명했다
아, 아버지 닮은 나를 누군가 마시고 있다는 느낌 붉은 립스틱을 칠하던 어머니를 지금도 저녁이 외면한다는 느낌
계간 《시인수첩》 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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