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시인 / 여각(旅閣)
휘적휘적 눈 깜짝할 새 당도한 기나긴 반백년 쉰, 이라는 문을 밀자 숨 가쁜 나날들 삐걱이는 무릎에 닿아 그동안의 행적을 굽어보는 것인데 격렬한 시간의 무늬 겹겹이 쌓여 있는 협곡마다 누구나 빛나는 한 시절 저장해두었을 테지만 생의 누추한 파문들 모두 무릎 근방에 몰려 있어 곧 시린 바람이 일 것 같다 잔뜩 녹이 슨 경첩처럼 뭉툭하고 못생긴 관절 이 깊은 틈새에서 불빛 하나 아득하게 깜박인다 그 어느 곳엔가 생에 두고두고 찾아갈 여각 한 채 나는 푸르른 등불을 앞세우고 숱한 저녁을 건너 이곳에 당도하였는가 시름시름 옛사랑을 추억하듯 걷고 있는가 허름한 변방도 등 기대면 그리움으로 남을 일이다 낯선 여각에 누워 기록하는 하루도 먼 날, 다시 내 간 길을 되짚어 돌아오고 싶을 것이다 돌아와 무심코 지나친 한때를 구석구석 둘러보리니, 시큰거리는 무릎이 보이지 않는 길들을 불러들인다 먼 곳으로부터 폭설이 찾아온다는 기별이다
최재영 시인 / 목련 1
창가의 목련이 흔들린다 이쪽을 기웃거리다 나와 마주치자 슬며시 외면해 버리는, 그 파문에 나도 잠시 흔들렸던가 목련의 한 시절이 내게 물들어 모두 북쪽으로만 가고 있나니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북(??)으로 향할밖에, 봄볕 몇 줌에도 꽃들의 좌우명은 바뀌나니 바람의 먼 기별에도 나는 자꾸만 눈물샘이 젖어들었으니 내 안의 그늘진 폐허도 한 번은 화들짝 피어날 것이니 나의 짧은 몇 걸음이 네게는 천 년을 견디는 일이어서 피고 지는 주어들도 한 계절을 걷는 일이어서 봄날을 건너가는 그의 잔잔하고 기인 호흡이 얼룩처럼 어룽지는 몇 날 목련 안쪽의 세상을 내 더 이상 알 수 없으나 떨어지는 날들도 한 생일 것이니 지금 막 눈 맞추는 순간이 너와 나의 평생이다 이리 뜨거운,
최재영 시인 / 꽃이 말하다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다 봄 그늘에 앉아 무심한 바람이 둥글 퍼지고 향기로운 햇살 몇 줌 도르르 구르는 것을 지켜보다 그 아득한 멀미 속을 헤매다가 끓어오르는 절정들을 그만,?복사하다 꽃의 이마는 늘 신열에 휩싸였으므로 뜨거움 속에서 종종 길을 잃다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 길은 무수한 통점이었느니, 돌아보니 폭풍처럼 지나왔노라고 지나온 길은 단숨에 지워졌노라고 꽃이 닫히는 시점 또한 눈멀고 말아 모든 찰나는 숨 가쁜 적요에 들다 하여 천 년을 피어 있어도 순간이라 기록하다 한나절 봄볕이 붉게붉게 소멸해 가다 그리고 진실에 눈뜬 자들은 이윽고 말하다 봄은,?오늘 또 몇 번의 허구를 재촉하였는가 꽃들이 기울어가는 봄날을 탁본하여 후일을 도모하다 다시 처음인 듯,
최재영 시인 / 필경사 2
밤새 천둥번개가 요란하였다 내밀한 필력을 자랑하는 꽃들이 허공에 몇 점 획을 찍는 아침 말 못할 천기를 예감하였을까 누군가는 하늘의 전언을 필사하느라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도도하고 정교한 문장을 틔우는 중이다 바람의 어수선한 틈을 놓치지 말 것 두려움과 초조함을 감추느라 혹자는 애써 꽃받침을 활짝 열어젖힌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세상의 징후를 기록하였던 바, 기록에는 별다른 기교가 필요치 않다며 담장 밑 그늘만을 꼼꼼히 채록하기도 한다 개화는 이미 밀서가 아닌 평서(平書)인 것 그러므로 꽃들은 쉽사리 서체를 내놓지 않는다 형형색색 눈부신 필력을 드러내기까지 그 미궁을 빠져나오는 데 평생이 걸릴 것이다 꽃들은 비밀을 간직한 두려움으로 몸을 연다 일필휘지 내리긋는 격렬한 몸놀림 새로운 필경사가 피어났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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