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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재영 시인 / 여각(旅閣)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6.

최재영 시인 / 여각(旅閣)

 

 

휘적휘적 눈 깜짝할 새 당도한 기나긴 반백년

쉰, 이라는 문을 밀자

숨 가쁜 나날들 삐걱이는 무릎에 닿아

그동안의 행적을 굽어보는 것인데

격렬한 시간의 무늬 겹겹이 쌓여 있는 협곡마다

누구나 빛나는 한 시절 저장해두었을 테지만

생의 누추한 파문들 모두 무릎 근방에 몰려 있어

곧 시린 바람이 일 것 같다

잔뜩 녹이 슨 경첩처럼 뭉툭하고 못생긴 관절

이 깊은 틈새에서 불빛 하나 아득하게 깜박인다

그 어느 곳엔가 생에 두고두고 찾아갈 여각 한 채

나는 푸르른 등불을 앞세우고

숱한 저녁을 건너 이곳에 당도하였는가

시름시름 옛사랑을 추억하듯 걷고 있는가

허름한 변방도 등 기대면 그리움으로 남을 일이다

낯선 여각에 누워 기록하는 하루도

먼 날, 다시 내 간 길을 되짚어 돌아오고 싶을 것이다

돌아와 무심코 지나친 한때를 구석구석 둘러보리니,

시큰거리는 무릎이 보이지 않는 길들을 불러들인다

먼 곳으로부터 폭설이 찾아온다는 기별이다

 

 


 

 

최재영 시인 / 목련 1

 

 

창가의 목련이 흔들린다

이쪽을 기웃거리다 나와 마주치자

슬며시 외면해 버리는,

그 파문에 나도 잠시 흔들렸던가

목련의 한 시절이 내게 물들어

모두 북쪽으로만 가고 있나니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북(??)으로 향할밖에,

봄볕 몇 줌에도 꽃들의 좌우명은 바뀌나니

바람의 먼 기별에도

나는 자꾸만 눈물샘이 젖어들었으니

내 안의 그늘진 폐허도 한 번은 화들짝 피어날 것이니

나의 짧은 몇 걸음이

네게는 천 년을 견디는 일이어서

피고 지는 주어들도 한 계절을 걷는 일이어서

봄날을 건너가는 그의 잔잔하고 기인 호흡이

얼룩처럼 어룽지는 몇 날

목련 안쪽의 세상을 내 더 이상 알 수 없으나

떨어지는 날들도 한 생일 것이니

지금 막 눈 맞추는 순간이

너와 나의 평생이다

이리 뜨거운,

 

 


 

 

최재영 시인 / 꽃이 말하다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다

봄 그늘에 앉아

무심한 바람이 둥글 퍼지고

향기로운 햇살 몇 줌 도르르 구르는 것을 지켜보다

그 아득한 멀미 속을 헤매다가

끓어오르는 절정들을 그만,?복사하다

꽃의 이마는 늘 신열에 휩싸였으므로

뜨거움 속에서 종종 길을 잃다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 길은

무수한 통점이었느니,

돌아보니 폭풍처럼 지나왔노라고

지나온 길은 단숨에 지워졌노라고

꽃이 닫히는 시점 또한 눈멀고 말아

모든 찰나는 숨 가쁜 적요에 들다

하여 천 년을 피어 있어도 순간이라 기록하다

한나절 봄볕이 붉게붉게 소멸해 가다

그리고 진실에 눈뜬 자들은 이윽고 말하다

봄은,?오늘 또 몇 번의 허구를 재촉하였는가

꽃들이 기울어가는 봄날을 탁본하여 후일을 도모하다

다시 처음인 듯,

 

 


 

 

최재영 시인 / 필경사 2

 

 

밤새 천둥번개가 요란하였다

내밀한 필력을 자랑하는 꽃들이

허공에 몇 점 획을 찍는 아침

말 못할 천기를 예감하였을까

누군가는 하늘의 전언을

필사하느라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도도하고 정교한 문장을 틔우는 중이다

바람의 어수선한 틈을 놓치지 말 것

두려움과 초조함을 감추느라

혹자는 애써 꽃받침을 활짝 열어젖힌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세상의 징후를 기록하였던 바,

기록에는 별다른 기교가 필요치 않다며

담장 밑 그늘만을 꼼꼼히 채록하기도 한다

개화는 이미 밀서가 아닌 평서(平書)인 것

그러므로 꽃들은 쉽사리 서체를 내놓지 않는다

형형색색 눈부신 필력을 드러내기까지

그 미궁을 빠져나오는 데 평생이 걸릴 것이다

꽃들은 비밀을 간직한 두려움으로 몸을 연다

일필휘지 내리긋는 격렬한 몸놀림

새로운 필경사가 피어났다는 소식이다

 

 


 

최재영 시인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2005년 《강원일보》와 《한라일보》,  200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창작기금 수혜. 2013년 정읍사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으로 『루파나레라』(천년의시작, 2010)와 『꽃피는 한시절을 허구라고 하자』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