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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명환 시인 / 북극을 날아라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6.

하명환 시인 / 북극을 날아라

 

 

눈엔 흐드러진 봄

머리는 겨울

만년설에 빙하인 마음

북극 같은 몸이다

그래도 이따금

빙하에 스미는 햇살

얼어붙은 겨울의 날개 녹인다

목줄 걸린 四季 거기

그렇게 비상해야 할

내 66.5도

빛 같은 어둠

그 눈부신 백야白夜를

연출해두고

 

 


 

 

하명환 시인 / 큰 눈사람

 

 

비 내리던 동지 섣달 밤 휘이잉 찬바람에

취객 된 싸라기눈 紛紛한 내 마음속을 싸댄다

겨울요정들의 폭죽놀이를 술주정으로 착각했었나?

넓은 앞마당에 쌓인 눈이 지난밤 내 속내완 달리

설렘에 덮여 반짝이는 신기루뭉치이다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에 처녀림을 밟듯 마당을 꽝꽝 밟는가

뽀드득 소리가 요술램프인 추억을 문지른다

아련한 연기 속에 나타난 램프 속 황소만한 하인요정

두런두런 함께 눈사람을 만든다

뒤꼍 자투리 채마밭까지 돌며 몸통과 머릴 만들고

아궁이 속 장작 숯 쪼가리로 눈썹, 눈, 코, 입 붙이고

누구에게 한 번도 빌려줘 본적 없는 귀마개도 씌우고

자치기막대기로는 두 팔을

장독대 조약돌은 몸통 가운데에 단추로 박고

마지막으로 팽이 끈 풀어 벙거지까지 씌운다

드디어 완성된 그 큰 눈사람, 기쁨도 잠시

램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하인을 보는 난

부루퉁한 부룩송아지가 된다

한마당 마당 굿처럼 지난시간이 바로 앞인데

먼 옛날에나 뭉쳐본 것 같은 똑같은 흔적 찾아

초점을 맞춘 눈이 휘둥그래진다 아니? 눈사람이 없다!

마당엔 싸락싸락 다시 내리는 싸라기눈

 

 


 

 

하명환 시인 / 글씨 없는 간판

 

 

저녁 노을에 고개 숙인 장터 간판들

그들의 땀은 비지땀이 아니다

가슴을 그믐달로 치며 흘리는 눈물이다

은하수 물결에 출렁이는 젖은 눈망울

텅 빈 좌판 위를 속절없이 배회한다

장돌뱅이의 술수 높은 높새바람, 시커먼 흙먼지에

넌덜나 눈 감아버린 장터 간판들

좌판 위 검뿌연 염원

제 글씨 잃은 간판들의 빛바랜 그리움이다

오늘밤도 은하작교 좌판에 몰려든 별꽃들

품바타령이 절로 나온다

솟구쳐 올라오는 이 떼거리 신명에

동병상련 견우 직녀오작교 무지개초롱 그리고 또 지우고

까막까치 땀처럼 흐르는 눈물 손사래 쳐 뿌린다

뿌려진 가랑비에 씻겨 부연해진 염원

푸른 날개 부비며 쌍무지개 창공을 치오른다

신명난 케케묵은 간판

숱한 세파 모질게 견뎌오다 쳐든 고개

아궁이속 같은 얼굴, 여명으로 벅벅 문지른다

아침노을에 제 글씨 내민 간판들

사방팔방 별꽃 풍각쟁이 금박 뜬 얼굴이다

 

 


 

 

하명환 시인 / 폐가에 핀 꽃

 

 

계룡산 상신리 산행길

새 주인인 어둠에 내몰린 전 주인

숱한 사연 덜구질하고 떠났을 집

폐가 한 채가 무덤이다

도굴된 무덤 속 널브러진 미라들

앞마당 잡초 사이로 올망졸망 채송화

고즈넉해 해말간 서러운 웃음

바람이 그 위에 앉아 축문을 읽고 있다

조문하듯 가파른 산등성이를 넘으며

산 아래 오던 길 뒤돌아본다

이른 저녁별 폐가에 조등처럼 불을 켠다

무명씨 무덤 앞 상석의 자리

누가 저리도 많은 향의 불 피우셨을까

 

 


 

 

하명환 시인 / 데칼코마니

 

 

학생들이 밀려간 빈 강의실 블랙보드

조금 전까지 교단 앞을 서성이던 내가 보인다

가방에서 나와 희로애락으로 짜깁기 된 얼굴

손에 들린 머릿속 무채색 지식

유채색 지혜로 바꿔보기 위해 마술을 부리고 있다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넥타이가 경망스럽다

초창기 교단에 서면 첫사랑보다 더했던 부끄러움

여울져 흐르는 당찬 세월에 부스러져갔어도

눈초리 부신 무대 후엔

아직도 땀에 젖은 백묵가루가 내손에 하얗게 묻어난다

그래도 하얀 선 그을 백묵으로

칠판 같은 가슴에 울대처럼 박힌 심지深智가

내 몸 어디엔가 조금은 꽂혀져있긴 했나보다, 아무렴

산다는 게 내 위에 나를 덧대는 모자이크 시간

그 시간표 따라 강의실로 밀려오는 꿈에 젖은 발자국들

발걸음을 돌리는 나와 우연히 마주친 눈빛

눈망울 속 저편 은빛초롱 눈길들, 포즈, 재잘거림

정규차선이든 갓길이든

어디선가 본 듯한 한눈에 익은 데칼코마니

 

 


 

 

하명환 시인 / 가고 싶은 길

 

 

마음 지도 접혔어도 못내 가고 싶은 길

아득한 저 푸르른 동쪽 벌

잦은 강풍 폭우에도 새아침 맞을

탱자나무 울타리 집 짓고

별꽃밭에 숨어버린 해맑은 얼굴들

그믐밤 별 헤듯 찾아보았으면

철따라

개나리 맨드라미 달맞이꽃 분꽃 채송화 들국화……

별빛 탄 내 노래 꽃인 듯 함께 피어나면

초롱초롱 쩡쩡한 밤하늘만 골라

앞마당에 한 마지기 들여놓아보았으면

수만리 싸리울 고향집 같은 길

어쩌다 지나는 길손 있으면

풀벌레소리 가사에 이슬 젖는 내 곡조 엮어

풀내음 한 상 가득 차려내고

깊어가는 삼경 달무리 지는 굴절의 밤

홍두깨 가슴으로 하현달 밀며

흉내 낸 바비큐나마

쪽마루 휘영청 달빛 버무려 구워내고 싶은데

손에 닿지 않는 길

지도 속 저 너머 웃자란 하루

오늘로 수확하고픈 덧없이 부서지는 날들이여

 

 


 

하명환 시인

2007년 『작가마당』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계간 《시안》 2010년 봄호로 등단, 서강대대학원 국제경영전략 박사. 우송대 국제경영학부 교수 역임, 시집으로 『신 브레인스토밍』(천년의시작, 2011)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