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나 시인 / 이음줄
보드랍게 접었다가 풀리는 담장 더 보드랍게 펼쳤다가 구부리는 고양이 담장 아래 줄무늬 고양이
툭 뻗는 자벌레 한껏 끌어당겼다가 까짓것 밀며 가는 자벌레 초록에서 초록으로 옮아가는 초록 자벌레
지하철 칸과 칸 사이 신도림역과 대림역 사이 떠도는 이런저런 궁리 밖으로 떠도는 늘 그곳, 낡고 낡은 강같은 평화
남자가 긋는 한 획 배웅하는 체온 한 켤레, 뭉근한
-《시와 표현》2017년 11월호
홍경나 시인 / 30번 버스정류장
우리 집에서 잠실역으로 가는 30번 버스정류장까지 길은 거의 같은 거리의 길이 두 갈래다
아파트 쪽문을 나와서 왼쪽으로 105동 106동 107동 바깥 담장을 끼고 걷다 얼마 전 카페로 개조한 파리바게트 뿌리염색 뽀글이 파마 전문 모던센스 미용실을 지나 웰빙 천원마켓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10미터쯤 내려가는 길과 쪽문을 나서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 바로 골목길 워석버석 담쟁이가 버짐처럼 번져있는 붉은 벽돌 신성빌라 서쪽 빛살이 들창을 섬처럼 지나는 가든빌라 항상 코끝에 돋보기를 걸고 있는 정 사장님네 반지하 유미세탁소 아침마다 내려앉는 참이슬 같은 어제도 내일도 365일 전단세일중인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진로마트 쪽으로 쭉 30미터를 더 걸어가는 다른 길이다
나는 30번 버스정류장에 갈 때 두 갈래 길을 번갈아 다닌다
짐짓 멀리가기 위해 길을 잃듯이 너무 멀리 와 버린 길 위에서 길을 잃듯이 또 길을 잃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길을 잃어왔을까 어떤 자신도 못한 채 한번은 첫 번째 길로 한번은 두 번째 길로 다닌다
어떤 날은 급해서 첫 번째 길로 갔고 어떤 날은 느긋해서 첫 번째 길로 간다
어느 길이 지름길인지 몰라 어느 길이 에움길인지 몰라
나는 여기저기 보도블록들이 꺼져 있는 두 갈래 길을 다닌다 나는 혼자 두리번두리번 이쪽 길로도 다니고 저쪽 길로도 다닌다
홍경나 시인 / 라고를 생각하다
말을 고르고 있는데 머뭇거림이 먼저 네게 전송되었는지〈라고 보냈어〉라는 문자가 왔다
나는 라고를 생각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네가 오는 방향으로 일어나 창밖으로 목을 내밀고 버뮤다와 아프리카 모스크바와 마드리드 오른쪽과 왼쪽 문득 다른 끝에서 불현듯 혼자 호주머니 속의 저녁 7시와 저녁 7시 이후 여전히 눈부시게 나를 에워싸는 라고를 생각했다 하얀 생크림 생일케이크가 되어 분명하게 뛰는 숨소리가 되어 조용히 착지하는 곁이 되어 라고를 생각했다
〈집사람에게 보낸 문자가 잘못 갔습니다〉
나는 라고를 생각했다 소복소복해지는 구석과 막 떠난 옆자리의 남은 온기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소실점 건성건성 지나는 저녁 해와 푸른 공기 더 푸르게 기우는 줄무늬의 골목 서쪽 베란다 걷지 않은 빨래와 피가 마르는 꽃바구니 쯧쯧쯧 냉장고에서 겉도는 쭈그렁사과가 되어 탁 탁 손을 털고 가는 먼발치가 되어 라고를 생각했다
나는 라고를 위해 라고를 생각했다 사소하기도 하고 더 사소하기도 한 너를 위해 라고를 생각했다 너는 돌아오지 않는데 네게 보낼 말을 고르는 무심함으로 라고를 생각했다 애면글면 라고를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사코 갸웃하는 한사코 네 안으로 갸웃하는 라고를 생각했다 너는 돌아오지 않고 라고를 생각했다
계간《문예바다》2018년 봄호
홍경나 시인 / 접속사
즉 데면데면 떠올려보는 것 은수저 몇 벌 앤티크 풍의 돋보기 잘 말아둔 기분과 진초록 나일론 륙색 그뿐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힐끔힐끔 끌리는 옆, 비스듬한 곁눈질처럼 떠올리는 것 이를테면 정장용 구두와 롱부츠 낡은 운동화에 삼선 슬리퍼 혹은 거실 창 마른 햇볕을 가려줄 블라인드와 먼지 낀 로만셰이드 서랍장 위 나무 손십자가와 장흥 바닷가의 조개껍데기 … 아무튼 떠오르는 것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만화 삼국지 서른 권의 주부생활 가계부
아버지는 없는데 늘 웃는 아버지 사진과 뚜껑도 열지 않은 북해도 마유크림 이와 함께 있는 하지만 말하자면 죽을힘을 다하는 푸른 소철나무와 머지않아 꽃피울 시클라멘 툴툴대는 무릎 유난히 불거진 콘솔 귀퉁이와 얄궂게 반짝거리는 우므러진 백양은 냄비 요컨대 하물며 따라서… 빈번히 오그라드는 그러나, 납처럼 꼼짝 않는 비슷비슷한 아울러 커피를 마시거나 저녁 장을 볼 때 이렇게 혼자 후미진 풍경처럼 이삿짐을 쌀 때 끄덕끄덕 몸속에 고이는 풀쑥 떠오르는 것 결국 마주하는 나였던 왜냐하면 여전히 나인 접속사 문득 꼭 필요할 거라는 생각을 떠올려보는 심플해지기 위해 수시로 체위를 바꾸는 것 그러니까…
-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201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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