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명춘 시인 /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그녀는 전복을 따지 않는다 문어도 잡지 않는다 그녀는 날마다 화장을 한다 귀에 리시버를 꽂고 음악을 듣는다 그녀는 바다로 돌아가지 않는다
환승역에 열차가 멈출 때마다 승강기로 넘실대며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인파의 물결들, 파도들 그녀에겐 바로 그때가 물때다 기다렸다는 듯 물안경과 오리발을 신고 그녀가 뛰어드는 시간이다
책 읽는 회사원의 까칠한 수염이 돋은 턱 밑을 지나 휴대폰 속 게임에 빠진 여대생과 그 남자 친구의 다리 사이를 지나며 그녀는 유영을 한다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그녀는 멍게를 잡지 않는다 해삼을 잡지 않는다 그녀는 날마다 선반 위에서 잔다 천장 손잡이에 거꾸로 매달려서도 잔다 그녀는 바다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상의 역을 열차가 통과할 때마다 창문으로 고기 떼같이 밀려 들어오는 햇살들, 신선한 공기들 그녀에겐 바로 그때가 일광욕을 할 때다 기다렸다는 듯 물안경과 오리발을 벗어놓고 온몸에 선크림을 바르는 시간이다
맨발로 걸으며 누군가 켜놓은 휴대폰 속 그녀는 영화나 드라마를 어깨 너머로 보다가 울기도 한다 때론 배꼽을 잡고 까르르 웃다가 뒤로 자빠지기도 한다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그녀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 생각이 많아서 그녀를 보지 못한다
함명춘 시인 / 붕어빵 장수
빌딩은 휘황한 골짜기에 서있는 잡목 같다
그곳에 한 점 불꽃을 달고 한 사내가 묵묵히 붕어빵을 굽고 있다
손님 하나 없는 살고 죽는 일에서조차도 비켜난 시간마저 붉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선
저 거대한 침묵 속에
사내가 하루 내내 반죽한 흰 살과 내장을 집어넣는다
조금씩 비린내가 새어 나온다 그의 손끝에서 지느러미를 꿈틀거리며 붕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별은 하늘까지 올라가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붕어의 눈망울이다 도시의 불빛은 서둘러 지은 붕어의 거처이다
오늘 떠오른 이래 처음 웃는 달처럼
거대한 침묵 한 귀퉁이에 걸터앉은 사내가 풀어놓은 붕어들이,
차도와 인도로 골목과 골목 사이로 아가미를 빠끔거리며 헤엄치고 있다
함명춘 시인 / 황금 비늘
준공 후 처음으로 동양 최대의 댐 수문이 열릴 때 수많은 기자와 인파들 사이에서 내가 기다렸던 건 수백 미터의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물줄기들의 곡예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에게 들은 한쪽 눈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물속에 사는 잉어였다 불치병에 걸린 노모를 위해 잉어 잡이를 나온 나이 든 총각 어부에게 붙잡힌 것이다 그녀는 산 채로 가마솥 속으로 던져졌다 뜨거움을 참지 못해 뚜껑을 차고 나온 그녀는 인간으로 변했고 살려만 준다면 노모의 불치병을 고쳐주겠노라며 자신의 한쪽 눈을 파내어 어부에게 건네주었다 감쪽같이 노모의 불치병이 완치되었다 어부는 그녀를 살려주었다 한쪽 눈이 없어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들은 정이 들었고 부부가 되었다 어부는 아홉 형제 중 장남이었다 큰 집이 필요했다 그녀가 지신의 비늘을 한 움큼 떼어내자 비늘은 황금이 되었다 어부는 황금 비늘로 큰 저택을 마련할 수 있었다 어머니를 통해 그녀의 신통력을 알게 된 동생들은 온갖 구실로 비늘을 얻으려 했지만 어부인 형이 가로막았다 별 한 점 없는 밤이었다 동생들이 독약을 탄 술을 형에게 먹인 뒤 잠든 그녀를 밧줄로 묶고 몸에 붙은 비늘을 하나씩 뜯어 가방에 넣었다 비늘이 뜯겨 나갈 때마다 그녀는 강물처럼 출렁거렸고 피를 쏟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한쪽 눈마저 파내기 위해 막내동생이 호미를 들고 다가갔다 순간 그녀는 펄펄 끓는 부엌의 가마솥 속으로 몸을 던졌다 형제들은 가마솥 뚜껑을 열려고 했으나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통째로 가마솥을 들고 나가 강물에 처넣었다 한 해가 지나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루에 한 명씩 마을의 젊은 청년이 한 명씩 익사체가 되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익사체는 노파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쪽 눈이 뽑혀 있었다 수시로 경찰차가 드나들었지만 사건은 자꾸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고 마을은 댐 건설 수몰지구로 선포되었다 하나둘 주민들이 떠나면서 적막이 마을의 주인이 되어 가더니 적막도 미궁의 사건도 마을과 함께 수장되고 있었다 마침내 댐의 수문이 열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카메라 셔터가 터지는 가운데 물줄기들의 곡예가 펼쳐지고 강 하류엔 그물과 족대를 든 사람들이 수문에서 떨어져 내린 고기를 잡고 있었다 어디선가 미터급 대어(大魚)가 그물에 잡혔다는 소리가 들려와 난 기자들을 따라 그곳으로 향했다 수십 번 버둥거리다가 그물을 찢고 나온 대어는 두어 바퀴 공중제비를 하더니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때 난 강가의 자갈 위에 떨어진 대어의 비늘 하나를 주웠다 그물의 주인은 대어의 한쪽 눈이 없었다고 했다 떠난 줄 알았던 대어는 한 번 더 솟구쳐 올라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강물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분명 대어는 한쪽 눈밖엔 없었다 내 손에 쥐어져 있던 비늘은 어느새 황금이 되어 있었다 난 황금 비늘을 강물에 던져 넣었다 잠시 치어처럼 꿈틀거리더니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대어가 솟구쳐 올랐던 자리엔 저녁노을이 곱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 번 더 대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난 하염없이 서 있었다
-시집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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