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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민 시인 / 여의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6.

허민 시인 / 여의도

 

 

그곳에서 오래전 우리는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쓰인

책 두 권을 서로 나누어 가졌다

하나는 남자의 이야기

또 하나는 여자의 이야기

가을, 겨울과 봄...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가는 동안 우리는 만났다

손을 잡았는지도 모르지

각자의 책을 읽고 나면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쓰인

그 책 두 권을 서로 바꾸어 보기로 했지

같은 계절과 같은 장소, 같이 만난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쓰여 있는 그 책을

우리가 서로 바꾸어 보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왜 사람들은

그들이 간직한

첫 번째 이야기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책은 벌써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불 타 사라졌거나, 혹은

깊은 창고에 갇힌 채 곰팡이가 슬어

어느 날 쓰레기더미와 함께 소멸했는지도 모르지

책은 사라졌지만

그때 내가 읽었던 처음 이야기는

불에 타고 재가 되어 흩어져도

세월 속 곰팡이꽃이 피었어도

여전히 꿈 속 페이지를 사납게 흔들며

영혼처럼 남은 생애를 떠돈다

나는 여전히 또 다른 한 권의 책

그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 권의

같지만 다른 책만을 읽고 또 읽으며

부질없는 밑줄을 그을 뿐

그것은 완전히 다른

똑같은 이야기

하여 벚꽃이 부서지고

그 아래 멈추지 않는 강물이

흐르고 흘렀던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1년 5월호 발표

 

 


 

 

허민 시인 / 그 밤의 문장들

 

 

불 꺼진 밤 새벽 세 시

알몸으로 삼층 창가에 서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그 마을에서 빗방울이 가져다주는

바다 냄새를 맡으며 그 방에서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멈추지 않는 비처럼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 어둠 속에서 땀방울을 토해내는 밤하늘과도 같이

 

그 밤 몇 번이나 당신의 끝을 파도처럼 부딪치고 캄캄한 절벽들을 조각조각 어루만지다

녹아버린 별들의 거품으로

다시 그곳을 돌아 나오곤 했다

 

옆방에는 취한 친구들이 우릴 위해 곤히 잠들고

빗소리의 주파수를 따라 일상의 소음을 감추며

생의 은밀한 신음들마저 우리는 서로의 내면으로 깊게

삼키었지, 달콤한 어둠 속에서

 

당신의 눈동자와 밤하늘이 번쩍일 때마다 잠시 비치곤 했던 하얀 곡선들은

휘어지는 별자리의 반짝임처럼

 

아주 잠시

 

존재했었다, 그 어떤 시보다 위태롭고 짧았던

서로가 서로에게 덧칠하던 그 어지럽고 축축한 영원의 문장들은

오로지 그 밤 속에서만

누구도 읽을 수 없는

 

잠시 쓰여졌다 다시 지워져

후에는 발견할 수 없는

오직 그 밤의 문장들이었다

 

 


 

허민(許旻) 시인

1983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웹진 《시인광장》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