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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명원 시인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6.

한명원 시인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팔각정 계단 위에 떠 있는 모자들

앞을 멍하게 보는 모자, 신문을 보는 모자, 옆사람에게 말을 거는 모자, 장기를 두는 모자

 

실버영화관 포스터에 옛날 배우는 어색하다

청춘은 어색하다

어색한 대사와 어색한 관계가 그립다

지나간 옛날을 빌려와 늙고 늙은 연애를 한다

 

영화 포스터에서 나온 사내가 총구를 겨눈다

느티나무 사이로 긴장이 관통한다

총성도 없는데 팔각정 계단을 꽉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동전 앞면 아니면 뒷면의 시간을 선택했던 순간이 새처럼 날아오른다

피는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는데

쓰러지는 장면이 가끔 있다

 

음악은 언제부터 구름 속으로 실종이 되어갔나 앞만 보며 달리던 돈가방은 어느 별에 도착했을까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철

 

모자들이 하나 둘 날아가기 시작한다 담배를 사던 복상회를 지나고 머리를 깎던 장수이용원을 지나 돌담길 따라 무상점심을 기다리는 긴 무표정의 줄

 

모자가 벗겨지고 또 벗겨지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고 노인공원이 있을 뿐이다

 

 


 

 

한명원 시인 / 임종, 사거리를 지나는 시간

 

 

사방이 열렸다

한 곳이 닫히는 시간

초록 불빛이 깜박거리듯 생과 생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온다

 

18초짜리 이파리들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1초로 소진된다

18초만큼 인간은 늙어왔고

18초만큼 숫자는 어려진다

 

인간계의 풍경이 빠져나가는 눈꺼풀은 무겁다

 

비상 점멸등이 속도를 들어 올리는 시간

발자국들은 굳어간다

1초 뒤가 먼 미래처럼

웃거나 소리치거나 화를 낸다

스쳐지나가는 옷깃들을 순식간에 입었다 벗는다

이내, 그림자마져 벗는다

 

0이되는 순간

나무는 죽거나 살아난다

일방이 사라진 통행은

길 위로 경적소리와 욕설들이 쏟아진다

뛰는 아이는

죽은 자와 산 자들의 욕설을 동시에 듣는다

 

할머니가 임종하는 18초

닫히는 한 생을 열고

다급히 뛰어오는 아이가 있다

 

 


 

 

한명원 시인 / 거절하는 몇 가지 방법

 

 

벚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찰나

주머니에 두 손 넣고

강가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 사진 좀 찍어 주세요

머뭇거리던 그가 고개 돌려

목을 빼어 친구를 부른다

 

그 사이 성급한 꽃잎은

몇 프레임을 이미 지나간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며 말을 건다

- 젊은 선글라스 씨 사진 좀 찍어주세요

그는 오래전에 본 천연색 꽃이 떠오르는지

잡고 있던 지팡이로 셔터를 누른다

흑백의 답을 꽃잎에게 전한다

 

그 사이 벚꽃은 흰색에서

노란색으로 검은색으로 변한다

 

맑은 눈빛의 아이가 프레임 속을 들여다보며

-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찍으려는 거죠

- 다만 꽃잎 떨어진 벚나무 한 그루 있는데

- 이걸 사진 찍으라는 건가요

 

주머니 속, 없는 손이 친구의 손을 부르고

선글라스 씨가 지팡이에게 도움을 청하고

아이가 자신의 맑은 눈을 빌리게 하며

꽃잎은 무엇을 기록하고 싶었나

 

순간의 시간을 놓아 버린 벚나무 가지가 앙상하다

 

 


 

한명원 시인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시집으로 『거절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음.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202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현재 기업체 인문학 강사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