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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양 시인 / 그거 안 먹으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2.

정양 시인 / 그거 안 먹으면

 

 

아침저녁 한 움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정양 시인 / 건망증

 

 

창문을 닫았던가

출입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꾸만 미심쩍다

다시 올라가 보면 번번이

잘 닫고 잠가놓은 것을

퇴근길 괜한 헛걸음이 벌써

한두번이 아니다

 

오늘도 미심쩍은 계단을

그냥 내려왔다 누구는

마스크를 쓴 채로 깜박 잊고

가래침도 뱉는다지만 나는

그런 축에 낄 위인도 못된다

아마 잘 닫고 잘 잠갔을 것이다

 

혼자 남은 주막에서

술값을 치르다가 다시 미심쩍다

창문을 닫은 기억이 없다

출입문 잠근 기억이 전혀 없다

전기코드도 꽂아둔 채로

그냥 나온 것만 같다

다들 가고 없지만 누구와도

헤어진 기억이 없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 일이냐

매일같이 닫고 잠그고 뽑는 것이

보통 일이냐, 그래, 보통 일이다

헤어진 기억도 없이

보고 싶은 사람 오래오래

못 만나는 것도 보통 일이다

망할 것들이 여간해서 안 망하는 것쯤은

못된 짓 못된 짓 끝도 없는 것쯤은

열어놓고 꽂아놓고 사는 것쯤은

얼마든지 보통 일이다

 

닫고잠그고가고보고싶고

다 보통 일이다 술기운만 믿고

그냥 집으로 간다 집에서도 다시

닫고잠그고뽑고열고마시고끄고그리고

깜박깜박 그대 보고 싶다

 

 


 

정양 시인

1942년, 전북 김제시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원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석사.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천정을 보며」 당선. 197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동심의 신화」 당선. 1980년 첫시집 『까마귀 떼』 1984년 『수수깡을 씹으며』 1993년 『빈집의 꿈』 1997년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창작과비평사 2001년『눈 내리는 마을』모아드림 2005년.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문학동네. 제9회 모악문학상, 제1회 아름다운작가상 수상,  2005 제7회 백석문학상. 2016.11 제8회 구상문학상, 현재 전주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우석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