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종 시인 / 완화병동
말라비틀어진 의식에 물을 뿌린다 진한 농도의 진통제가 수액을 타고 흘러 내린다 마비된 척추가 움찔거린다 슬픔과 고통이 잠시 위치를 바꾼다 시들어가는 뿌리가 다시 고개를 든다
면회시간에 맞추어 굳게 잠긴 기도가 문을 연다 허파꽈리는 심지를 불태우며 그렁그렁 소리를 낸다 산소마스크는 마지막 기포까지 우려내고 있다 완화병동에 백색바람이 분다
심장 박동기의 모니터가 깜박거린다 대기실 화면이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살려달라는 비명은 들리지도 않는데 코드블루가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주치의는 활짝 열린 동공을 다시 노크한다
서쪽 하늘에 막장구름이 몰려든다 각자 자신만의 불행을 찾아 서로의 마우스를 클릭한다 산그림자를 잉태한 노파가 일몰처럼 펄럭인다 의식의 머리맡에 간병인이 사다리를 놓고 있다
김연종 시인 / 문진(問診)
내 몸은 공갈빵처럼 부풀었어요 간교한 립스틱 발기한 비곗덩어리 낙태한 심장까지 수은온도계처럼 충혈된 욕망의 피톨들로 가득 찼어요 중독된 항문에 바리움을 넣고 물구나무서기를 해요 적당히 간이 밴 불안이 몸 밖으로 솟구쳐요 목에 두른 공포가 붉은 스카프처럼 펄럭여요
무녀처럼 몸을 떠는 그녀의 말을 간신히 받아 적었다
온통 지뢰밭인 유년으로부터 탈출 하세요 당신은 스스로 상처받는 자신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걸어서 당도할 수 없는 生의 밑바닥까지 행진 하세요 뿌리 채 뽑힌 짐승의 신음소리도 알 수 없는 바람의 힘을 빌어 먼지처럼 휘날립니다 죽은 가지만으로 안락한 집을 지으려거든 감수성의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기세요
내 정수리를 뚫고 지나가는 섬뜩한 칸나의 입술 확인사살 같은
김연종 시인 / 구의역 9-4
그러니까 이건 익숙한 퍼즐이다 출근길 인파처럼 반복되는 스토리다 입 안 가득 한기를 머금은 숟가락이다 영혼의 간식거리도 되지 못한 스크린도어 시들은 공허한 말장난만 되풀이 하고 있다
그러니까 너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픈 19세 소년일 뿐이다 밥알이 튀어나올듯 바쁜 스케줄로 고장 난 아침을 수선한다 공구가방에 담긴 나무젓가락이 거미줄에 걸린 너의 하루를 옥죄고 있다
그러니까 네 운명은 팽목항 갈매기처럼 온 종일 선로를 배회하는 일, 분명 레일은 2인1조로 달리는데 너는 돌아갈 날개 한 쪽이 사라졌다 뜯지 못한 컵라면이 쓸쓸한 주검처럼 게이트에 놓여있다
그러니까 가난은 순환열차처럼 그 자리로 되돌아온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라면처럼 허리를 굽혔다 펴기를 반복한다 옆구리가 불어터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무런 기적도 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긴 너와 내가 동시에 넘나드는 지옥문이다 노란 포스트잇으로 뒤덮힌 네 무덤을 낙하산들이 주시하고 있다 가당찮은 날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순환구조를 구의역 4번출구를
김연종 시인 / 사자자리와 처녀자리가 만나면
지구별에서 멀지 않고 여름과도 그리 멀지 않는
너와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그곳에서
서로의 굽은 등을 끌어안고 시들어가는 관절의 안부를 물으며 넝쿨장미 같은 여름밤과 맞장도 뜨다가
함께 살아온 날과 함께 살아갈 날이 팽팽하게 맞설 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는지 (홍상수가 부러운 건지) 김민희가 부러운 건지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맞는지 홍상수가 불쌍한 건지 (김민희가 불쌍한 건지)
백세인생 같은 소문과 함께 살다가
새와 결별하고 저녁별과 불화하고 나서도 어차피 점성술은 반반이라고
당당하게 갈기를 세우고 간절한 발걸음으로 장난도 치다가 황홀하게 버둥거리는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길을 건넌다 위태롭게 서 있는 남자가 있다 도로엔 그렁그렁한 별빛이 가득한데
더는 너와 마주치지 않을 그곳에서
마지막 모더니스트처럼 명랑한 로드킬처럼
김연종 시인 / 식구
식구와 가족은 엄연히 다르다 둘 다 패밀리라 부르지만 가족과 달리 식구는 한 끼 식사에 집중한다 운명공동체인 가족보다 밥상 공동체인 식구가 내겐 더 끌린다 우리 식구는 나를 포함하여 네 명, 모두 닉네임을 사용한다 옆 침대의 스피커가 쩡쩡 울린다 그는 밥을 먹을 때도 물을 삼킬 때도 쩝쩝거린다 매미처럼 펑펑 울기도 한다 귀가 어두워지면서 볼륨이 커진 것이다 건너편 침대에는 우두커니가 있다 그는 종일 장승처럼 꿈적하지 않는다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마찬가지다 가족이 다녀갈 때도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다 전두엽 상당부분이 길을 잃은 게 분명하다 바로 그 곁에 라디오가 아침 조회처럼 윙윙거린다 그는 속삭일 때마저 손 마이크를 사용한다 그가 입 근처에 손을 올리면 스피커도 우두커니도 가만히 자리를 뜬다 요즘 부쩍 가족 자랑이 많아졌지만 아직까지 면회 온 가족은 없다 전직 교장인 그가 우리를 가족처럼 대할지 식구처럼 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주변을 살피고 있다 우리 식구들은 나를 감시카메라라 부른다
김연종 시인 / 카우치*에서 시를 읽다
손님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소파인지 침대인지 비스듬한 안락의자에 누웠다 천정은 높고 창문은 비좁았다 식은 커피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종업원인지 바리스타인지 흰 가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뜨거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 지난 풍경들이 연탄가스처럼 스며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묻힌 기억이 몽롱해졌다 균열의 시작은 몸을 둘러싼 지붕이 아니라 몸을 촘촘히 떠받치는 내면의 기둥에서부터 시작된다 구겨진 쪽지를 건네주며 생각나는 대로 읽고 보이는 대로 말하라고 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점자처럼 어른거렸다 내 유년시절도 먼지처럼 떠다녔다 물에 빠져 죽은 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지붕이 불타기를 간절히 바랐다 뜨거운 냄비를 탈출한 비단뱀이 아궁이를 향해 돌진했다 흰 연기가 꼬리곰탕처럼 끓어올랐다 썩지 않은 누이가 썩은 지붕에서 쏟아져 나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소화되지 않은 말들이 입 속에서 오물거렸다 억압된 언어로 울퉁불퉁한 기억의 뼛조각을 채워 넣었다 지금까지 내뱉은 말이 자유연상이면 치유가 될 것이고 자동기술이면 詩가 될 거라고 했다 약값을 지불했는데 약 대신 껌딱지 같은 책 한 권을 주었다 단물이 빠지기 전에 책상다리에 붙여 놓았다.
*카우치 : 정신분석에서 사용되는 안락의자, 자유로운 연상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침대모양의 평평한 의자를 일컫는 용어.
김연종 시인 / 데스홀릭
입술과 항문과 성기가 없는 그 곳으로 가면 술 마시지 않고도 잠 들 수 있으리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고독을 한 줌 먼지로 방점 찍을 수 있으리 아직 내 몸을 빠져 나가지 못한 맹독의 환상마저 알레르기 행진곡처럼 온 몸을 붉게 물들이고 뇌 속까지 울려 퍼지리 퍼덕이는 아가미에서 미늘을 뽑고 밀랍된 고통의 타투를 말끔히 제거해 이카로스의 날갯짓 없이도 마음껏 하늘을 날 수 있으리 슬픔과 광기와 피흘림이 없는 그 곳으로 가면
주어진 글을 읽고 <심리학적 부검>을 위해 고통 관리 위원회에서 내놓은 대책 중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가장 부합하는 경우를 고르시오
1) 옥상으로 가는 모든 길을 차단한다 고층 아파트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고 특히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번지점프 앞을 서성거리는 여고생들을 집중 검문한다
2) 베르테르 효과를 차단하기 위해 모든 소설을 사전 검열한다 드라마 영화에서 죽음의 장면을 삭제하고 특히 자살장면은 상영을 중지한다 조간신문의 부고 란도 폐지한다
3) 각 펜션에서는 연탄과 화덕을 소지한 봉고차의 출입을 제한한다 청테이프와 청산가리도 압수 대상이다 허름한 주택가 골목에 하루 이상 방치된 차량의 동태를 파악한다
4) 권총과 커터칼 압박 붕대등의 판매를 엄격히 제한한다 데드 캠프의 감시 카메라를 증편하고 모니터를 집중 감시 체제로 전환한다
김연종 시인 / 자가진단
눈알을 빠트렸는데 안구의 깊이를 알 수 없어요 딱딱한 두개골로 퉁퉁 부은 눈알을 측정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지요 천둥치고 비 내리면 어차피 우물은 깊어지게 마련이니까요 숟가락 깨지는 소리가 우물 속에 울려 퍼져요 피를 나누었던 형제들은 각자의 숟가락으로 서로의 눈알을 겨누고 있어요 벽 속의 눈알은 유리알처럼 빛나고 침대 위에 벗어놓은 안경집은 굳게 입을 다물었어요 진찰실에서 육신의 비밀은 낱낱이 드러나지만 눈 속에 깊이 감추어둔 홍채의 비밀은 여전히 풀기 어려워요 이미 깨진 손거울로 절망의 표정을 기록할 수는 없어요 눈알을 빠트렸는데 우물의 깊이를 알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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