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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영 시인 / 봉인된 기억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3.

손영 시인 / 봉인된 기억

 

 

끝없이 줄지어 선 복숭아나무 사이로

봄이 오고 바람과 햇살이 드나들었다

가지마다 단물이 흘러내리는 이곳은

내 기억의 중심

늘 그곳에서 과육의 향기가 날아온다

 

그 기억의 끝자락에는

포클레인의 굉음이 매달려있다 계절이 제 입을 떼기도 전

꽃을 버리고 건물을 선택한 도시는

신도시 대열에 합류했다

복사꽃빛의 땅은 모두 빌딩 속으로 사라졌다

 

꽃들이 매장된 거리

콘크리트로 포장을 끝낸 도시는 낯선 얼굴로 다가왔다

봄의 푸른 무릎으로 일어서던 마을에

분양을 알리는 전단지들이 꽃잎처럼 날아다녔다

 

고열로 펄펄 끓던 동생에게 떠먹이던 달콤한 황도복숭아

침이 고이던 물컹한 기억도 이제 딱딱해졌다

 

마트에 즐비한 복숭아통조림, 이 많은 복숭아는 어디에서 왔을까

 

이곳에서

문득, 사라진 복사꽃밭을 보았다

 

 


 

 

손영 시인 / 도시의 봄

 

 

봄보다 먼저 방문한 황사

도시는 재빨리 마스크를 쓴다

 

24시편의점,

정수기 판매원 삼각김밥을 앞에 놓고

휴대폰을 연신 들여다본다

전화번호를 검색하는 하루의 영업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다시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청년은 뜨끈한 국물로 충전중이다

실적을 채우려면 배터리를 꽉 채워야 한다

 

필터의 기능을 강조하는 정수기 판매원

정작 자신의 근심을 거르지 못해

늘 목이 마르다

방문객을 걸러내는 경비실

팸플릿 정수기보다 더 깐깐하다

좀처럼 열리지 않는 정문의 필터를 통과해야 한다

 

모서리 많은 세상

매운바람이 옷깃을 잡는다 군데군데 남은 추위로

을씨년스러운 거리, 메마른 계절은 표정이 없다

 

실업률이 올라가는 봄

방전된 청년이 다시 편의점에 앉아있다

 

 


 

 

손영 시인 / 폐가의 공식

 

 

이 빠진 바람이 괜스레 문고리를 흔든다

 

금세 햇볕마저 식어버리는

폐가의 공식은

어둠으로 지은 고양이 울음과 먼지로 얽힌 거미줄이다

난해한 행간 사이로 짐승의 울음이 다녀간다

떠돌아다니는 것은 늘 오답이다

 

마당에 물음표로 서 있는 잡초들

이 공식에 뛰어든 풀벌레 소리도 사라지고

흘러가는 구름을 ( )로 묶어 봐도

그 괄호는 금방 풀리고 만다

 

기침소리를 지우고

손님처럼 왔다 가는 이 계절은

척추가 한 자尺나 기울었다

 

처마 밑 빗물의 발자국들, 바람이 주저앉았던 자리

어느 한 개라도 빠질 수 없는

빤한 정답이 손에 잡힌다

 

폐가는 완벽한 공식을 완성하려고

흘러내리는 뼈를 그대로 방치중이다

 

 


 

 

손영 시인 / 찰나에

 

 

까만 푸들을 끌고 공원에 나갔다

하얀 포메라니안이 스쳐갔다

순간 둘은 뒤엉켰다

이 찰나를 만들기 위해

어떤 수많은 시간이 이어져 있었는지

어떤 기다림이 들어있었는지

순식간에 둘은 뒤엉켰다

두 여자가 황급히 달려가 목줄을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버티는 강아지를 양쪽에서 당겼다

 

꽃을 배회하는 나비

꽃에 앉는 순간 무엇을 감지했을까

불꽃이 당겨지는 순간은 몇 초일까

 

처음 본 당신에게 내 심장이 요동치던 그날

누군가 나에게 왔던 일도

나와 전혀 다른 당신을 떨쳐내지 못했던 일도

어쩌면 오래 전 준비되었던 일

이미 주어진 시간 속에 들어 있었던 일

두 개의 꽃잎에 겹친

가장 긴 찰나

 

 


 

 

손영 시인 / 나이스 샷

 

 

그날 당신은 나를 멀리 떼어 낼 심산이었나 봐요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듯

먼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보내고 싶어했지요

나는 허공을 찢으며 한없이 나아갔어요

굿샷 굿샷

 

우리 만나는 동안

당신이 주문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딱 그 만큼의 거리

안착점이 어딘지 나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어요

 

호흡도 멈춰가며 당신이 그토록 집중했던 시간도

비껴가거나 넘치거나 흘러가버렸어요

그렇게 듣고 싶어 했던 때그락, 소리를 지나치며

만남 내내 원하던 거리 밖에서 게임은 그렇게 끝나버렸어요

나의 연속적 실수에 허탈해진 당신

말없이 초록에만 시선을 두고 있네요

늘 두드려 맞으면서도 당신 곁에 있어야하는

우린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천생연분

 

큰 키에 쇠막대 같이 무뚝뚝한 당신

작고 동그란 얼굴에 톡톡 튀고 싶은 나

 

 


 

손영 시인

경남 진해 출생. 마산교육대학 졸업. 『시인정신』으로 등단. 부천 신인상 수상. 부천 예술 공로상 수상. 2014년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지원금 수혜, 시집『공손한 풀잎들』.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