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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대흠 시인 / 먹어도 먹어도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2.

이대흠 시인 / 먹어도 먹어도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는 농심 새우깡처럼,

아무리 그리워해도 나의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고,

바삭바삭 금방 무너질 듯 마른기침을 토하며,

그리워 그리워해도 그리움은, 질리지 않고,

물 같은 당신께 닿으면 한꺼번에 녹아버릴 듯,

왠지 당신의 이름만 떠올려도 불길처럼,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는 그리움은,

 

 


 

 

이대흠 시인 / 마음의 호랑에서 코끼리 떼가 쏟아질 때

 

 

당신에게서 문득 파닥이는 꽃을 받았습니다

 

5초간,

감정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을 방법을 연구합니다

 

당신이 내민 꽃 떼를 받지 않을 수 없어서 나는 이름에 갇힌 죄들을 모두 풀어 버렸습니다

 

이러다 꽃에 물리면 온통 당신의 향기가 독처럼 퍼질 것입니다

 

지금 떠나시렵니까?

 

나의 마음은 충분히 방목 중입니다

 

 


 

 

이대흠 시인 / 에서의 산책

 

 

당신을 볼 수 없을 때는 바람의 줄기를 헤아립니다

국숫발처럼 쏟아지는 바람 중 어느 한 줄기는 당신과 이어져 있을 것입니다 햇살이 내 살을 만질 때면

어떤 기척이 왔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의 작은 미동이 내게 전달된 것이겠지요

 

꽃을 보기 위해 세수를 합니다

신앙이 아니어도 아름다움에 대한 예의는 필요합니다

영업을 하러 가는 사람처럼 나는 준비합니다 나는 꽃에게 가장 좋은 살을 보일 것입니다

 

당신 앞에 선 듯 꽃 앞에 선 나는 몇 가지 표정을 지어보입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있지만 살의 말을 숨기기는 어렵습니다 살의 떨림과 살의 향기를 그대로 노출합니다

 

당신이 살로 왔을 때 꽃으로 반응하던 내 살의 떨림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요?

 

살이 말하고 살이 듣습니다

입술보다 먼저 눈동자보다 빨리 살은 소통합니다

 

당신이 꽃 피어서 나는 웃습니다

 

 


 

 

이대흠 시인 / 외꽃 피었다

 

 

꽃과 가시가 한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글을 읽는 동안

지금은 다른 몸이 한몸에서 갈라져나온 시간을 생각하는 동안

꽃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가시를 품는 것이라는 것을 새기는 동안

 

꽃이 오셨다

 

어쩌지 못하고 물외처럼 순해지며 아픈 내 마음이며

줄기와 잎이 가시로 덮였어도 외꽃처럼 고울 그대에 대한 생각이며

견디지 못할 것 같았던 몸의 그리움을 마음의 그늘로 염하는 시간이며

 

 


 

 

이대흠 시인 / 귀가 서럽다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이대흠 시인 /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뜨거운 물을 땅바닥에 버리지 않는다 수챗구멍에도 끓는 물을 붓지 않는다 땅속에 살아있을 굼벵이 지렁이나 각종 미생물들이 행여 델까 고것들 모다 지앙신 자석들이라 지앙신이 이녁 자석들 해꼬지 한다고 노하면 집이 망해분단다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는다 그 나라 부엌의 수챗구멍 밑에는 염라대왕이 젝기장 들고 앉아 누가 먹을 것을 버리는지 살피고 있다 죽어 저승 갔을 때 한 톨 쌀을 한 가마로 쳐서 고걸 드는 벌을 슨단다 귀한 음석 함부로 하먼 쓴다냐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감을 딸 때도 까치밥 두어 개는 반드시 남겨 둔다 배고픈 까치는 물론 까마귀 참새 들까지 모두 제 밥이다 날아와 먹는다 가을걷이할 때는 까막까치 참새를 다 쫓지만 그 어느 것이라도 굶어죽는 건 우리 몸의 일부가 떨어지는 것이기에

 

먹을 것 귀한 겨울에는 산 가까이에 시래기나 생선뼈를 놓아두기도 한다 배고픈 산짐승들 그걸 먹고 겨울 난다 때로 산토끼를 잡기도 하고 들고양이를 쫓기도 하지만 제아무리 고방 생선 훔쳐먹는 도둑괭이라도 새끼 밴 암컷에겐 생선 대가리를 내어준다 행에나 새끼 밴 짐승 죽게 하먼 사람 새끼도 온전치 못하는 벱이다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똥오줌이 오물로 버려지지 않는다 땅에서 온 모든 것 땅에게 돌려준다 그마저 생오줌이나 생똥으로 갚는 게 아니다 사람이란 독한 짐승이라 사람 침에 뱀이 죽고 사람 발에 풀이 죽고 생똥 생오줌에 채소가 녹기에

 

생오줌은 합수통에서 지글지글 끓여서 독기 다 뺀 후 무 배추 밑 돋우는 거름으로 쓰고 생똥은 짚풀과 섞어 한 육 개월 푹 삭힌다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베어내지 않는다 나무마다 신이 있어서 허락없이 베어내면 살(煞) 맞아 사람 목숨 하나가 끊어지기에 정히 나무 필요할 때면 막걸리 두 되쯤 바친 후 나무신 마음 먼저 풀어주고 톱 댄다

 

죽어 땅으로 돌아갈 때도 잡초 우거진 빈 땅이라고 함부로 구덩이 만들지 않는다 파낸 자리마다 무덤자리라 뜻 없이 파낸 자리엔 사람 목숨 하나 눕게 된다는 머나먼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이대흠 시인

1967년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리에서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를 졸업. 1994년 《창작과 비평》 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귀가 서럽다』, 『물 속의 불』, 『상처가 나를 살린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와 장편소설『청앵』 연구서 『문학파의 문학세계 연구』, 시쓰기 교재『시톡』 1,2,3 산문집 『탐진강 추억 한 사발 삼천 원』, 『이름만 이삐먼 머한다요』,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가 있음. 조태일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전남문화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