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남궁선 시인 / 온양온천역 왼편 호박다방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3.

남궁선 시인 / 온양온천역 왼편 호박다방

 

 

다방은 커피가 이천오백 원밖에 안 해 담배 피는 그녀

기차는 다섯 시 오십 분에 떠나고

 

가족탕이라고 해 봐야 방 하나에 욕조 하나 주는 거야

재떨이에 침을 뱉는 그녀, 이월의 바람이 사내들을 따라 들어오고

 

다방의 기표는 어항, 메뉴판 없어요? 여긴 메뉴판 없어요

플라스틱 수초를 바라보는 그녀와 나

 

우리 여관은 거의 달방으로 나가 … 대실은 재미가 없어 오래된 집이야

그녀의 엄마는 여관을 넘기고

종종 대실료 이만 원씩 챙기던, 소일거리 없어진 그녀

 

커피 콜라 쥬스 주세요

연변말처럼 서울말 쓰는 아가씨가 커피를 흘리고

콜라엔 얼음이 없다 괜찮은데 커피 잔을 닦는 아가씨, 괜찮다는데

 

승마 지은 시인이 누구지

승무라고 말하고 싶었던 그녀 그 걸 기억해서 뭐하지

가을엔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에 가고 싶어

어항 너머 도금 팔찌의 사내를 바라보는 그녀

 

여기 얼마예요 만원만 주세요 가격미정의 값들

 

어느 찻집보다 더 작고 낮아서 우린 여기까지 왔을까

끝내 커피 값도 콜라 값도 쥬스 값도 알 수 없는 호박다방

 

 


 

 

남궁선 시인 / 결론으로 향하는 분홍

 

 

겨울 외투의 사람들이

그녀를 감싸고 노래를 부른다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고요한 화음 속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

푸른 눈꺼풀 올려 바라보는 창밖의 구름

그녀의 구토는 분홍

간호사도 보호자도 치워주지 않던 분홍

겨울 외투의 사람들이 멈추지 않고 쏟아내는

얼룩 말 나무 바늘 같은

말들의 보호색 분홍

지붕이 하얗게 높아지는 집

계단에 눈이 쌓여 갈수록 연탄재 분홍

고음이 삐걱거리는 합창곡 구름 너머

부드러운 계단을 따라 퍼져나가는

아름다운 찬송과 창밖 풍경에 대한

삼단논법의 결론 밖에서

내가 기다리는 것들에 대해서 곰곰이

뭉개지는 눈 어두워지는 아스팔트의 시간

그녀의 머릿결을 닮은

분홍의 결론 같은

암청색 슬리퍼를 벗고 깊은 겨울을 날아서

 

 


 

 

남궁선 시인 / 미인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

구두코에서부터

나는 시작한다

 

동작 대교를 건널 때

63빌딩의 허리는 가늘다

빛을 모으는

검은 구두의 끝

 

햇살에 톡톡톡 터지는 오렌지색 도트무늬 원피스를 지나

 

그녀의 목까지

도달한다 황금비율의 거리에서 나는

 

눈물의 냄새를 생각한다

그녀의 목이 높고 촘촘한 러프주름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목의 길이를 추측하는 것처럼

해가 지고 있다

 

옥상의 빈 화분과 부러진 훌라후프를 통과하는 빛과 같이

 

터널 속으로 진입하는 그녀의 손톱이 조금 선명해진다

그녀의 다리가 교차한다

세상의 모든 빛이 둥글게 빠져나가고

미녀는 언제나 얼굴이 없다

 

 


 

 

남궁선 시인 / 누에섬

 

 

누에섬에 물이 가득 차 올랐어요 조개는 속살이 다 익기 전에 먹어야 맛이 좋지요 누에섬은 누런 바다와 기운 해와 조개구이집 스물 두 칸과 공중변소와, 형광등 푸른 불빛이 바르르 떠는 방안에서 우린 누에섬으로 떠돌았어요 양치기 소년 같던 당

신은 가끔 문틈 사이로 소리를 질렀어요 나비가 나타났다 나비가, 나는 당신의 몸통을 이불로 둘둘 말아 발길질을 했지요 그런 밤, 당신의 눈에 흐르는 맑고 가는 실을 뽑아 나비문양의 벽지를 엮었어요 단잠에 빠져 들어도 엉킨 실들은 자라지 않았어요 당신은 배를 뒤집고 버둥대는 날들을 보냈지요 문틈 사이로 못 자국 같은 빛들이 박혀 들어와요 은빛 못들이 수놓는 푸른 방, 누에섬으로 떠도는 대부도 조개구이집에 앉아 누에섬을 바라보고 있어요 당신은 익지 않은 조개 속살을 입에 넣어줘요 당신의 거짓말이 가리비처럼 벌어져요 누에섬, 푸른 방으로 가라앉는 만조의 시간이에요

 

 


 

 

남궁선 시인 / 내 친구 박수

 

 

내가 싫어하는 빨간색 빅볼 펜, 이것 하나면 되겠니

내 친구 박수는

소중하지 않은 것 하나만 줘 그럼 저주해줄게

내가 싫어하는 빨간색 빅볼 펜, 너에게 줄까

청동방울 샀다고 전화 하지마

 

꽃 진 나무들이

담벼락 아래 폐휴지로 쌓인 벽이

불 꺼진 우유 대리점 간판의 글자가

박수의 창으로 흘러들어갈 때

유혹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기도하고 싶어 안달 난 박수에게

안녕!

핏빛 구름 명랑한 노을이

여름을 따라 지고 있었는데

누군가 영원히 내 곁을 떠나고 쌀알이 익어갈 때

비 온 땅이 다디달아 푹푹 떠먹고 싶었는데

 

세상 끝에서 한 발짝 내딛었을 때

내 귀가 팔랑거리고

달팽이 울음소리가 커다랗게 들리고, 타들어가는

다음 계절에 대해 입술이 꿈틀댈 때

점괘를 고르는 박수

 

마지막으로 쓴 빨강 이름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사소한 저주는 끝이 나지 않네

너와 나의 귀가 바뀌었는지 간혹

들려오는 달팽이 거미 모기 백일홍 사람의 울음소리

 

 


 

남궁선 시인

1973년 인천 강화 출생. 장안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성신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2011년 《시작》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당신의 정거장은 내가 손을 흔드는 세계』(천년의시작, 2013)이 있음.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