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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호 시인 / 머킬티오 도서관의 사계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3.

김영호 시인 / 머킬티오 도서관의 사계

 

 

머킬티오 도서관은 책이 울창한 문학의 숲이다.

이 숲 속에서 누군가의 영혼과 만나는 설렘을 갖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숨소리가 들린다.

에머슨 소로우 휘트먼이 산책을 하고

바이런 랭보 괴테가 자작시를 낭송하며

타고르 한용운 윤동주가 명상 기도를 한다.

문향이 짙은 이 숲에선 고뇌하는 힘이 솟아난다.

슬픔과 번민도 서정시로 걸어 나온다.

성자의 맑은 음성이 대화를 걸어온다.

한 권의 책안에 구도자의 발자국이 찍혀있다.

비가 내리는 겨울, 키 큰 전나무가 들어와

벽난로 앞에서 책을 읽다가 코를 곤다.

창밖에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시인 프로스트가 눈을 맞으며 풀밭을 걷는다.

4월이면 시집 속의 시인들이 화단의 꽃들로 피어난다.

5월이면 철죽꽃이 로빈새와 들어와 함께 시를 쓴다.

9월이면 롱펠로우가 흰 구름 배를 타고 내 가슴에 노를 젖는다.

시월의 붉은 단풍잎이 다람쥐 눈 속에서 새벽별로 반짝인다.

머킬티오 도서관,

책 읽는 사람들 얼굴이 깊은 산속에서 나온 사슴의 얼굴이다.

글을 쓰는 사람의 얼굴이 고목에서 나온 새싹 같다.

 

 


 

 

김영호 시인 / 포옹

 

 

도서관 창 밖

빨갛게 만개한 철쭉꽃

그 꽃을 오래 바라보니

그 꽃도 나를 오래 바라보았네.

 

따뜻한 눈길의 철쭉꽃

그 꽃눈을 오래 바라보니

그 꽃이 안으로 들어와

포근하게 안겨 주었네.

 

긴 포옹...

내 몸 속에서 혁명이 일어났네.

청춘이 탱크를 몰고 들어 와

멜란콜리*를 폭파시켰네.

 

긴 포옹...

내 몸 속에 새 공화국이 세워졌네.

멜란콜리 적군들의 피로 물든 벌판에서

사랑에 취한 시민들이 축포를 쏘아 올렸네.

 

온 몸에 철쭉꽃이 피었네.

우주가 철쭉 꽃밭이 되었네.

내 몸이 우주가 되었네.

 

*멜란콜리(Melancolly): 우울.

 

 


 

 

김영호 시인 / 시애틀의 사월

 

 

시애틀의 사월은 시(詩)의 달이다.

연인들이 숲속으로 들어가 산책을 하고

철쭉꽃으로 걸어 나와 시가 된다.

벚꽃들이 호숫가를 걷다가

화가의 머리위에 앉아 시가 된다.

사람들이 스케짓 밸리*에 모여

땅속에서 소풍 나온 튤립꽃들과 글짓기를 한다.

도서관의 시집들이 창밖 화단으로 나와

야생화로 피어 벌 나비에게 시를 가르친다.

나뭇가지위에 청개구리들이 매달려

연못속의 애인들에게 구애의 보이스톡을 보낸다.

 

시애틀의 사월엔 모두가 시인이 된다.

바닷가 조약돌들이 사람 손안에 파도시를 쓰고

갈매기들 유람선 고동소리를 물어

창공에 흰 구름 시를 쓴다.

사과나무들 색동옷 입고

새 엄마가 끄는 유모차속으로 들어가

동요를 부른다.

 

겨우내 가장 외롭던 새가

가장 맑은 소리로 사랑의 시를 낭송한다.

 

*스캐짓 밸리(Skagit Valley): 시애틀 북쪽 튤립꽃 농원이 있는 마을.

 

 


 

 

김영호 시인 / 나무는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비가 내리는 날

가로수들 까만 가래를 뱉어내고 있다.

맨발로 서서,

 

키가 자꾸만 낮아지는 제 그림자에 업힌

늙은 소나무

푹 꺼진 배에 새끼줄을 동여매고

곪은 무릎엔 구멍이 패여 있다.

 

몇 안남은 잎새들

자꾸 게워져 나오려는 말을

무슨 끓어오르는 덩어리 같은 것을

꾹꾹 밑으로 재우고 있다.

 

나무는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순전히 몸으로 때우고 있다.

최루탄도 화염병도

황사 매연 산성비도 순전히 몸으로 막고 있다.

 

나무는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김영호 시인 / 파종

 

 

한 방울 이슬에서 성모마리아 같은

맑은 여인이 걸어나와

내 귀 끝에 풀 한 포기 심어 주네.

그 풀의 꽃피는 소리가 귀 안의 슬픈 매미들을 달래 주네.

 

나도 귀가 먼 사람들 몸에

이 풀꽃 피는 소리를 파종하여

그들 귀 끝에 나비가 춤추게 하고 싶네.

그들 귀 안에 시냇물소리가 흐르게 하고 싶네.

 

그들의 귀가 한번 발전?電되는 것을 보고 싶네.

 

 


 

 

김영호 시인 / 시애틀의 하늘

 

 

그 없이 맑고 푸른 하늘에

낮달이 이조백자로 떠 있네.

그 백자 속에 청주?酒가 가득하네.

모든 세상사 손을 놓고

저 하늘술 만으로 평생 취하고 싶네.

 

저 맑은 이조의 술향기가

온전히 내 속을 물들이기 위해선

몸에 쓴 모든 낙서 다 지우고

가슴이 새 백지 한 장이 될 일이네.

하여, 내 귓속의 신음소리를 산새의 악보로 그리고

물고기의 무곡舞曲으로 만들 일이네.

하여, 상처 깊은 사람들,

몸이 아파 울지도 못하는 자들,

나의 몸에 핀 시를 읽고

그들 몸에서 새 풀잎이 돋게 할 일이네.

그들 눈썹에서 사과꽃이 피게 할 일이네.

 

귀가 울어 잠들지 못하는 자,

그의 귀에서 패랭이꽃이 피게 할 일이네.

 

 


 

김영호 시인

1945년 충북 청원에서 출생. 한국 외국어 대학 영어과 졸업. 일리노이주립대학교대학원 비교문학 박사. 1991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의 초상』『무심천의 미루나무』『잎사귀가 큰 사 람』『『순복』 『머킬티오도서관의 사계』와 기타 저서로는『한용운과 휘트먼의 문학사상』과 『문학과 종교의 만남』이 있음. 현재 숭실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영미시, 비평),  미국 하와이 주립대 초빙교수, 워싱턴 주립대 교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