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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안진 시인 / 슬픈 약속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3.

유안진 시인 / 슬픈 약속

 

 

우리에겐 약속이 없었다

서로의 눈빛만 응시하다

돌아서고 나면 잊어야 했다.

 

그러나 하루만 지나도

어김없이 기다려지는

너와의 우연한 해우.

 

그저 무작정 걸어봐도

묵은 전화수첩을 꺼내

소란스럽게 떠들어 봐도

 

어인 일인가,

자꾸만 한쪽 가슴이 비어옴은.

 

수없이 되풀이한 작정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가 닿았음직한 발길을

찾아나선다.

 

머언 기약도 할 수 없다면

이렇게 길이 되어 나설 수밖에.

내가 약속이 되어 나설 수밖에

 

 


 

 

유안진 시인 / 물오징어를 다듬다가

 

 

네 가슴도 먹장인 줄 미처 몰랐다

무골호인(無骨好人) 너도 오죽했으면

꼴리고 뒤틀리던 오장육부가 썩어 문드러진

검은 피 한 주머니만 껴안고 살다 잡혔으랴

바닷속 거기도 세상인 바에야

왜 아니 먹장가슴이었겠느냐

 

나도 먹장가슴이란다

연체동물이란다

간도 쓸개도 배알도 뼛골마저도 다 빼어주고

목숨 하나 가까스로 부지해왔단다

목고개 오그려 쪼그려

눈알조차 숨겨 감추고

눈먼 듯이, 귀먹은 듯이, 입도 없는 벙어린 듯이

이 눈치 저 코치로

냉혹한 살얼음판을 어찌어찌 헤엄쳐왔던가

 

 


 

 

유안진 시인 / 13평의 두 크기

 

 

  너무 늦은 축하가 미안해서, 양초와 하이타이 등을

잔뜩 사들고 인사를 갔었지. 13평 임대아파트에서

13평 아파트로 이사 간 집으로.

 

  쉰셋 나이에 처음 제 집에 살아본 안주인은, 종아리까지

걷어 보이며 불평불만이었지. 석달이나 지났어도

부은 것이 안 풀린다고, 괜히 넓은 집 사서 다리만 아프다고,

청소하기도 힘들다고, 평수는 같아도 크기는

엄청 다르다고.

 

  그녀의 그 어불성설(語不成說)의 화법이 이따금씩

내 두통을 쫓아주며 메아리치곤 하지.

 

 


 

 

유안진 시인 / 병마총

 

 

  서안 가서 병마총을 구경하다가, 되살아난 미치광이 폭군을 보았다,

재위 2년부터 제 무덤을 팠다는 진시황이 나를 픽 웃었다

 

  나도 중학교 적부터 내 무덤을 파고 싶었지, 시인 외에는 아무것도

안 되려던 그 때부터, 원고지 속으로 숨고 싶었지, 내가 싫어하는

<나들>을 깊이 묻어서 감추고 싶었지, 술 담그고 싶었지, 장 담그고

싶었지, 아니지, 원고지에 묻혀서 부활하고 싶었지, 포도주, 간장,

고추장처럼 <다른 나들>로 되살아나고 싶었지

 

  아직도 원고지에다 내 무덤을 파고 있다, 구겨 뭉쳐 던져버린

파지에서 살아나지 못하는 나무들의 비명에 귀 틀어막으며,

새 원고지에다 내 무덤을 파고 판다, 나도 나의 병마총에 미쳐,

혈세를 강탈하는 나의 폭군이면서-.

 

 


 

 

유안진 시인 / 봄비 한 주머니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 아냐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월

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이 짓거리뿐이라서―.

 

 


 

 

유안진 시인 / 초상화가 좋다

 

 

원고는 쓰기 싫어도 원고료는 늘 좋다

 

세종로 퇴계로 율곡로를

싸돌아다니면서도

이 어르신들 닮으려는 생각, 해본 적 없었으면서도

초상화는 늘 좋다

 

세종대왕 열한 장에

퇴계선생 석 장

율곡선생도 한 장

다보탑도 아홉이나 되지만

다보탑보다는 초상화가 훨씬 좋고

복사판이지만 진본보다 더 좋고

어진(御眞)이 가장 좋다

 

신하보다 임금님을

학문의 깊이보다 자리의 높이를 더 좋아하다니

부끄럽지만 내 탓만은 아니다

한국은행 탓이거나

조폐공사 탓이지

 

쓰라면 쓰리라

휴대폰이 울린다, 원고청탁 아닐까?!

 

 


 

유안진(柳岸津) 시인

1941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서울대 사대 및 동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등단. 1970년 첫시집 『달하』를 간행한 이후 『물로 바람으로』 『월령가 쑥대머리』, 『봄비 한 주머니』 등 10여 권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했고, 수필집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 『축복을 웃도는 것』 등과 장편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땡삐』 등의 작품이 있음. 한국펜문학상(1996), 정지용문학상(1998), 월탄문학상(2000) 등을 수상. 서울대 아동학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