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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건청 시인 / 쇠똥구리의 생각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3.

이건청 시인 / 쇠똥구리의 생각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고 가다가 잠시 멈춘다.

지금 내가 거꾸서 서서 굴리고 가는 저것은 풀밭이다.

이슬에 젖은 새벽 풀밭위로 흐린 새 몇 마리 떠갔던가.

그 풀밭을 지나 종일을 가면 저물녘 노을에 물든 이포나루*에 닿을까.

거기 묶인 배 풀어 밤새도록 흐르면 이 짐 벗은 채,

해 뜨는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남한강 지류에 있는 옛 나루터

 

 


 

 

이건청 시인 / 서리

 

 

기다리마. 천천히 조심조심

서두르지 마,

마등령으로 천불동 계곡으로

빨강 깃발 펄럭이며 달려와

달려오는 너,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흔들어 깨우며

단풍이야, 단풍의 때야

달려오는 너, 넘어지면 안되지

피가 나면 안되지,

벌써 이슬 차고 검은 벌레들은

찬 세상에 알을 낳는다.

기다리마. 천천히 조심 조심

진부령 너머 한계령 너머

홍천강 따라 오너라.

양수리 지나 팔당 너머

아파트 101동 505호에 잠든

가난한 시민의 이마라도 짚어다오.

 

 


 

 

이건청 시인 / 젖고 있는 들판에게

 

 

들판이 하나 젖고 있다

목이 마른 들판 하나가

남풍에 몸을 맡긴 채 비를 맞고 있다

봄비에 젖고 있다

어디선가 노고지리가 운다

미루나무는 미루나무끼리

오는 봄을 먼저 보려고

발뒤축을 들고 서 있다

일렬로 서 있다

우리들의 마른 들판 하나가

쟁기날을 기다리면서 젖고 있다

상추싹도, 연초록 아욱싹도

오고 있다. 실비 속에

마른 들판 하나가 젖고 있다

 

 


 

 

이건청 시인 / 그 배를 타고 싶었다

 

 

그 배를 타고 싶어

새벽 바다에 가면

검고 흐린 배들이 떠 있었다

닻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배 뒤에서 다른 배가

돛을 올리고 있었다

뱃사람들이 뱃사람들끼리

배를 타고 있었다

검고 흐린 배들이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새벽 바다에 배들이 떠 있었다

그 배를 타고 수평선을 넘고 싶었다

그 배를 타고 싶어 새벽바다에 가면

뱃사람들이 뱃사람들끼리 만

출렁이고 있었다

그 배를 타고

수평선을 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이건청 시인

1942년 경기 이천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同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받음.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가작 입선. 1970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이건청 시집』, 『목마른 자는 잠들고』 외에 다수 있음. 시선집에『해지는 날의 짐승에게』가 있음.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등을 수상.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