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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분홍 시인 / 우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3.

김분홍 시인 / 우물

 

 

닫힌 그녀의 눈

풍경을 편집하지 못하지

나선형 계단의 아바네리 쿤다*

천이백년 동안 자신의 눈을 본 적이 없어

 

내 안이면서 네 안 같은

내 안의 깊이가

그녀의 마음보다 더 깊을까

얼마나 깊은지 좀처럼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어

물줄기가 말라가는 샘에는 이끼가 자라지 않지

어려워지고 있는 눈동자가 굴러가지 않게

 

우물에 눈동자를 넣고

눈동자를 누르면

 

안이 밖을 찍은 거니

밖이 안을 찍은 거니

 

눈이 내릴 때 그녀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지

일요일의 시력으로 양치질을 끝낸 그녀가 눈동자를 가방에 넣고 교회 횡단보도 앞에 서 있어

신호등이 5분마다 깜빡거렸지만

저 우물은 초록과 빨강을 구별하지 못하는 흑백이야

 

그녀의 눈에서 일 월과 이 월의 우물이 찰랑거렸어

두레박질 소리가 마른 우물가, 들려오는 소문은 수선이 필요하지

 

*아바네리 쿤다: 인도 자이프로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계단식 우물

 

 


 

 

김분홍 시인 / 원피스

 

 

저 지우개는 고장 난 시간

저 단추는 자물통의 비밀번호

저 무늬는 빗소리

저 율동은 언덕을 오르는 당나귀

저 주름은 음모가 많은 가방

저 배경은 버려진 우물

저 뒷모습은 봄날의 의자

저 향기는 눈구멍만 뚫린 복면

 

 


 

 

김분홍 시인 / 바다를 구독하다

 

 

오랫동안 나는 고립됐다

 

등대와 파도와 포구 풍경으로

파도 소리 삭아 내리는 구부런진 해안선에 의탁했다 나는 구독한다, 바다를

 

파도 소리를 만지면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다의 페이지들

풍경 빠져나간 그물이 느슨해진 관계를 깊는다

 

나는 고립된다, 한 개의 말뚝으로

한 개의 말뚝에 몇 장의 출생신고서가 묶여 있다

 

나는 포구의 등과 분쟁한다 밀물이 포구의 목을 조르면 나는 등을 뒤척인다

바다에 한 발 걸치고 뭍으로 녹슨 머리를 향한다

한발의 썰물 앞에 새로운 밀물들이 넓적하다

 

내가 끌고 온 길이 삭제된다

발을 풀지 못하고

뭍으로 올라온 폐선

나는 떠나온 바다를 기웃거린다

 

시집, 눈 속에 꽃나무를 심다, 에서

 

 


 

김분홍 시인

충남 천안에서 출생. 201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눈 속에 꽃나무를 심다』 (파란, 2020)가 있음. 2019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수혜.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