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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리영 시인 / 검은 원피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4.

이리영 시인 / 검은 원피스

 

 

세탁소는 어디 가고

꽃집이 있다

 

지난 계절 잊었던 원피스를 찾으러 왔는데

 

유리문은 밀어도 열리지 않고

이미 닫힌 계절이라는 듯

 

꽃이라도 한 아름 가지고 싶어져

 

프리지아, 리시안셔스, 카라, 모란, 델피늄, 라넌큘러스……

 

옷장에서 색색의 옷들을 끄집어낸 적이 있고

그것들을 창밖으로 내던진 적이 있고

 

유리문을 있는 힘껏 두드리는데

 

안에서 꽃집 주인이 날 향해 미소 짓고 있다

내 검은 원피스를 입고서

 

계절은 돌아올 테고,

그때마다 검은 원피스를 벗어둔 채로

 

아스팔트 바닥에 널브러진 색색의 옷 무더기를

한참이나 내려다본다

 

곧 죽을 사람처럼

 

병든 벚나무 가지에

비닐이 씌워진 백색 원피스가 걸려 있다

 

 


 

 

이리영 시인 / 가방들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의 가방을 들고 나왔다

내가 모르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므로

나는 고기를 썰고 당신과 입을 맞추고 저 햇빛 아래 빈 유모차를 끌고 고기를 씹고 인공호수에 물고기 밥을 뿌리고

어떤 가방은 끝내 열리지 않아 그런 날이면

철조망을 따라 걸었다 내가 아는 슬픔 또한 슬픔이 아니어서

붉은 손톱자국 부서진 피아노의 건반들 깃털만 가득한 새장 당신이 키우는 식물의 그늘을 지나

어느덧 커튼이 쳐진 거실에 당도하는 것이었다

푸른 수영장 텅 빈 바닥에 버려진 갈색 가방처럼

아무것도 좇지 않고 누구의 손도 마주 잡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당신만 아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므로

커튼 너머 저 햇빛 아래 아무도 울고 있지 않았다 믿기지 않아

나는 로즈메리 이파리를 씹고 검은 개의 목줄을 쥐고 언덕에 오르고 책을 읽고 당신의 두 손을 내 가슴에 가만히 얹고 모두가 떠나고

벽에 기댔다 기대고 나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 누구든 기다리는 자세로

욕조에 물이 넘쳤다

가방들이 바닥과 함께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리영 시인 / 빈집

 

 

방에 아무도 없는데 밤새 누가 생긴 거 같다

 

지켜봤을까 눈을 떼지 않고

엄마가 나를 낳을 때처럼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엄마가 나간 문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식탁에는 한 끼 식사가 음각되어 있다

창가 죽은 화분에 햇볕이 먼지를 일으키며 쏟아지고 있다

 

벌어져 더 벌어지지 않는 칫솔로 이를 닦는 일

 

무용하게 카드를 뒤섞듯

거울 속에 번갈아 나타났다 사라지는 가족의 얼굴

 

한때 기르던 검은 개를 한참 만에 찾아낸

거실장 서랍은 늘 열려 있다

 

죽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기에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확신해야 한다

집에 몇 개의 문은 닫혀 있고 몇 개의 문은 숨어 있다

 

나는 나가기 위해 문을 두드린다

 

어디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

살아있었다는 증거다

 

 


 

 

이리영 시인 / 피뢰침

 

 

피뢰침을 집에 두고 온 날이었어요 태어난 것에 큰 의미를 두지 말자던 목소리가 떠올라 발끝이 멀고 흐렸던 날씨였지'요 강둑은 멀지 않고

 

오래전 음악이 되겠다고 떠난 아버지는 내가 돌아서는 골목이다 낡은 전쟁 사진과 빈 악보를 보내왔어요 그는 바람대로 음악으로의 죽음을 관통하는 중일까요 어디든 투구를 쓴 무리들이 잘 뭉쳐진 먼지처럼 몰려 다녀요

 

방공호를 뚫는 낙뢰가 수시로 떨어지고 있어요 어떤 분쟁지역에서는 죽은 자들의 눈꺼풀만 뜯어먹는 개들이 살고, 자욱한 포화 속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야 아이들은 발만 자라나요

 

내 손은 작아지고 있어요 거대한 발바닥을 닦아주고 싶지만 할아버지는 자기가 죽창으로 찔러 죽인 빨치산을 죽을 때까지 욕했어요 강둑에 묻힌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서로를 엄호하며 강바닥에 다다르는

 

먼 훗날이라는 허구의 시간에도 하늘은 둘로 쪼개지고 비에 한 번도 젖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물의 흔적을 따라 걷겠지요 벼락 맞아 시커메진 나무들이 자꾸 내 등에 뿌리를 내려요

 

나는 이제 피뢰침을 그만 믿기로 했어요 이곳은 누구의 귓바퀴인가요 방향도 없이 가장 낮은 곳으로만 흘러드는 강물속에서 가냘픈 멜로디 하나가 떠올라요 나는 거기에 대고 참았던 숨을 내뱉어요

 

 


 

 

이리영 시인 / 그에 관하여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무에게도 그의 인상착의를 묻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를 모릅니다 하지

기다려보기로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유리창의 세계는 어떤 자연법칙을 생성하는 중입니다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넘기다 툭 발치로 떨어진

그는 양손잡이면서 양손이 없습니다 어쩌면 손이 사라진 곳에서 오는지도 모릅니다

그와 나는 동시에 주저앉은 적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어느 훗날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는 그의 내부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도 같습니다

새 한 마리가 유리창을 통과해 내게 날아옵니다

순식간에 어깨를 밀치고 등 뒤로 자취를 감추는

찻잔은 서서히 식고 유리창의 세계는 쉬지 않고 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누굽니까 그를 기다리는 나는 어디서 멈춰서야 할지 모르고

아무도 유리창을 깨지 않습니다

빈 찻잔과 양손만을 남긴 채

 

 


 

 

이리영 시인 / 건조주의보

 

 

잘 알던 것들이 빠져나갑니다

모두가 범죄자인 이곳엔 창살은 없습니다

달아나면서 쫓는 훔치면서 뺏기는

나는 어떤 신호 체계에 적응하는 중입니다

열쇠 다음은 나비, 목요일 다음은 모래 언덕입니다

나는 무엇의 다음이지만, 어떤의 다음은 아닙니다

유성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나는 얽은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책상에 빗살무늬를 새기며

가장 무거운 물이 고여 탄약이 되길

불가능한 답을 찾아 떠난 자들은

나침반 같은 고개를 가졌습니다

나는 믿음이 희박해진 교리를 거꾸로

베껴 적으며 내가 죽은 다음을 위해 조용히

모래에 불을 붙입니다

시커먼 가지에서 흘러내리는 모래

 

 


 

이리영 시인

1972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의류환경학과 졸업.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홍익대학교 미학과 석사과정 수료.2018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