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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천 시인 / 벗어나기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4.

김혜천 시인 / 벗어나기

 

 

눈먼 자가 촛불을 들고 어둠을 더듬는 동안

넥타는 사라지고

소금쟁이 한마리 수면 위 고요를 흔든다

사념의 바람 수면을 치면 물은 얼고

소 발자국에 고이면 바닥이 갈라진다

쉽게 열리지 않는 꽃봉오리

(업) 했다 안했다

(앎) 안다 모른다

(시간) 과거 현제 미래

(공간) 여기와 저기

머뭇거림이여

네 개의 문을 통과하라

명상처럼 내려 앉는 빛

티끌에 묻힌 빛을 응시하라

그곳에서 빛나는 너 그대로의 너에게로

 

「시와세계」 66호 발췌

 

 


 

 

김혜천 시인 / 소리의 질료

 

 

누가 숲을 고요하다 하는가

 

정령들의 눈동자가 아침을 핧는

물안개 피어오르는 숲에는

 

나무와 나무의 간격을 이어주는 바람의 숨결

나비 날개짓에 춤추는 이파리들

꽃술의 달콤함을 터는 꿀벌의 진저리

바위에 붙은 가슴 부풀어 올라 키득대는 이끼들

유두같이 매달린 버찌의 젖몸살 앓는 소리

죽은 나무 등걸에 피어난 상황버섯의 물기어린 속삭임

직박구리가 쪼아 떨어뜨린 나뭇가지의 신음

지층을 흔들고 솟아난 동충하초의 함성

 

비척거리는 내 활자들 허공 더듬는 소리

 

세로로 가로로 공기를 흔들며

흩어지는 소리, 소리들

 

5월의 숲

말 그 너머의 세계, 소리들이 환하다

 

 


 

 

김혜천 시인 / 찻물의 내변內辨

 

 

투명한 유리 주전자에

물 한 사발 푸른 불꽃 위에 올린다

 

해안 蟹眼-하안蝦眼-어목魚目-연주連珠-용천慂泉-등파고랑騰波鼓浪-세우細雨

 

게의 눈알 만하게 바닥에 들러붙은 물의 꿈

바닥을 딛고 떠올라 새우의 눈을 뜨고 세상을 엿본다

점점 넓어지는 동공, 둥글고 또렷한 물고기의 눈으로 대양을 헤엄친다

수면으로 떠오르며 구슬을 꿰듯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

심연의 고요가 거꾸로 치솟는다

마침내 북을 치듯 파랑이 일듯 한바탕 끓어오르고서야

잔 빗방울이 수면 위에 내리듯 잦아드는 물

 

그저 바라보고 기다릴 뿐

잘 익어 한 잔의 차가 되어 쓰여지길 기다릴 뿐

 

 


 

 

김혜천 시인 / 품크툼의 향연

 

 

빛의 보폭을 조절한다

색조를 맞추는 조리개가 어지럽다

동공에 포착된 먹잇감이

125분의 1초 스투디움* 안에 갇힌다

 

누가 나를 정보의 틀 안에 가두었는가

내 안에 창은 언제나 열려 있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마라토너의 발놀림

흩어졌다 모아졌다 하는 구름

비를 몰고 다니는 바람소리

찰나에 일어나는 수많은 우연

하찮게 버려지는 것들의 아우성

빛 뒤에 숨어 있는 섬광의 촉수

탯줄로 이어지는 깊숙한 곳을 찌르는 상처

 

수없이 망설이는 손가락 끝의 떨림

꿈틀거리는 창 안 에는

빛이 속도로 끝없이

푼크툼*의 향연이 이어진다

 

*스투디움(studium);사진기법으로 사물이나 혹은 사람에 대해 열성적이긴 하지만 강렬 함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일반적 감정

*푼크툼(punctum);라틴어로 점(鮎)을 뜻하며 화살처럼 아프게 찌르는 강렬한 요소

 

 


 

 

김혜천 시인 / 드라이 풀라워

 

 

인사동 오래된 전시실

미로에 갇힌 꽃

흑백 사진에 담긴 명암을 본다

 

레몬잎 아이리 억새 해바라기 잇꽃

연밥 다북쑥 냉이꽃이 말라간다

 

말라간다는 것은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것

절벽에서 어둠으로 허물어지는 것

헐거워진 그물같이 멀어져 간

너와 나

풍장 되어 바싹 말라가는 몸

다시 젖을 수 있을까

내안에 말라버린 물관을 찾아본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 사이로

빛의 음성을 듣는다

 

 


 

 

김혜천 시인 / 바라춤*

 

 

상여도 없이 떠났다

북한산 기슭 비워두었던 방에 연탄불을 피워 넣고 주말을 맞았다

신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

알몸으로 껴안은 부부를 자욱한 안개가 삼켰다

그녀의 몸 안에 애벌레 한 마리도 함께 잠들었다

어허이 어헝

비도 울지 못하고 추적대는 날 이승의 경계를 넘었다

그들의 하늘은 어디일까

부부가 살던 무릉도원에 해마다 흐드러지게 피는 복사꽃

춤사위 곁으로 나비 세 마리 팔랑거린다

 

*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천도하는 춤

 

 


 

김혜천(김혜숙)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15년 월간 《시문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윤동주서시문학상 제전위원,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