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 / 갈대숲에서
기러기 몇 마리 갈대 숲에 자고 있다 하이얀 갈꽃들이 서리 묻은 새들의 꿈을 덮어주고 있다 경기도 화성군 조암면, 혹은 우정면, 사내 하나 엎어지고 있었다 모세혈관 하나 터지고 잠시, 선혈이 번지고 있었다 서리 내린 세상의 흙 위로 얼음발이 퍼지고 있었다 하이얀 갈꽃들이 서리 묻은 새들의 꿈을 덮어주고 있다
이건청 시인 / 암각화를 위하여
여기 와서 시력을 찾는다 여기 와서 청력을 회복한다 잘 보인다 아주 잘 들린다 고추잠자리까지, 풀메뚜기까지 다 보인다. 아주 잘 보인다 풍문이 아니라, 설화가 아니라 만져진다, 손끝에 닿는다 6천여 년 전, 포경선을 타고 바다로 나아간 사람들, 작살을 던져 거경(巨鯨)을 사냥한, 방책을 만들어 가축을 기른, 종교의례를 이끈, 이 땅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숨결로 온다, 와서 손을 잡는다 피가 도는 손으로 손을 덥석 잡는다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서 오라고, 반갑다고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한반도 역사의 처음이 선연한 햇살 속에 열린다 여기가 처음부터 복판이었다고, 가슴 펴고 세계로 가는 출발지였다고, 반구대 암각화가 일러주고 있다 신령스런 벼랑이 일러주고 있다 눈이 밝아진다 귀가 맑아진다 잘 보인다. 아주 잘 들린다.
이건청 시인 / 식구
감자를 먹었다 심지를 낮춘 등잔불 아래 저녁 식탁에 모여 감자를 먹었다 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이른 황사 바람만 담벼락에 묶인 시래기를 흔들고 가는데, 심지를 낮춘 등잔불 아래서 구운 감자를 먹었다. 동치미 사발에 파란 파가 떠있었다. 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날은 어둔데, 하늘엔 철새들이 가는지, 스척스척 날개짓 소리가 등잔불 심지를 흔들고,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감자를 먹었다. 아버지는 오시지 않는 저녁, 식구들 끼리 둘러 앉아 감자를 먹었다.
이제 감자 굽던 어머니도 감자 먹던 형도 안 보이는데, 이따금, 저물녘 지붕 위의 철새 소리를 듣고 싶은 때가 있다. 심지를 낮춘 등잔불 다시 켜고 감자를 먹고 싶은 때가 있다.
이건청 시인 /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곡마단이 왔을 때 말은 뒷마당 말뚝에 고삐가 묶여 있었다 곡마단 사람들이 밥 먹으러 갈 때도 말은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꼬리를 휘둘러 날것들을 쫓거나 조금씩 발을 옮겨놓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묶여 있었다
날이 저물고, 외등이 환하게 밝혀지고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말은 그냥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곡마단 곡예사가 와서 고삐를 풀면 곡예사에 끌려 무대에 올라갔는데 말 잔등에 거꾸로 선 곡예사를 태우고 좁은 무대를 도는 것이 말의 일이었다
크고 넓은 등허리 위에서 뛰어오르거나 무대로 뛰어내렸다가 휘익 몸을 날려 말 잔등에 올라타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곡예사는 채찍으로 말을 내리쳐 박수소리에 화답해 보였다
곡예사가 떠나고 다른 곡예사가 와도 채찍을 들어 말을 내리쳤다 말은 매를 맞으며 곡마단을 따라다녔다
곡마단 사람들이 더러 떠나고 새 사람이 와도 말은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꼬리를 휘둘러 날것들을 쫓거나 조금씩 발을 옮겨놓기도 하면서 평생을 거기 그렇게 묶여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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