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혜 시인 / 최선의 감옥
설원의 끝에는 북쪽이라 불리는 감옥이 있다 불에 타 죽은 개와 얼어 죽은 개가 나란히 매달려 있다
열쇠 꾸러미를 허리춤에 달고 걷는 교도관과 보폭을 맞추는 죄수들 그것이 최악인 사람과 그것이 최선인 사람이 걸어간다
이미 죽은 사람이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다는 가정
어느 방향으로도 짖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다리를 타고 절벽을 오른다 아무도 북쪽 끝까지 가보지 않았지만
동전을 던지고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깊은 웅덩이를 만든다 얼어 죽은 개의 무덤을 파헤치면서 무덤 속을 비추면서
바닥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파리는 시들지 않고 죽어가는 개는 죽지 않는다
사과나무 위에 피어나는 사과나무들 씨앗이 싹틀 때 씨앗을 낚아채는 새의 발톱
그림자 하나로도 수백 개의 음표가 완성되고 있었다
손바닥과 손바닥을 맞대며 눈 속을 걷는다
등 뒤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하나, 둘 기록하면서
김신혜 시인 / 어린이대공원
피에로가 아이들에게 풍선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 있다
꼭지를 입에 물고 풍선이 터질 때까지 부는 아이들 풍선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건 항상 아이들이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풍성한 잔머리를 손질해준다
가위를 숨긴 채 뒷짐을 지고 있는 피에로를 바라보며
눈이 찢어지도록 웃는다
얘들아, 처음 입에 문 젖꼭지는 고무처럼 질기고 우리는 우유를 삼키며 비릿한 거짓말을 배웠지
늘어진 가슴을 내놓은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며 우리는 어른들이 모르는 세계로 갑니다
버려진 오색 풍선들로 가득 찬 하늘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
아름다워, 남자와 여자가 우산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로 포개질 때 아이들은 막대기로 그림자를 가르며 우르르 뛰어간다
빗물에 화장이 흘러내리고 피에로의 얼굴이 오색으로 젖을 때까지
김신혜 시인 / 투명한 덫
햇빛을 향해 찌푸리던 사형수가 눈을 감을 때 빛의 잔상과 싸우는 것처럼
목격자는 저렇게 많은 살육을 꾸미려고 부드러운 융단에 스크래치를 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입을 크게 벌려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닥에 투명한 덫을 놓을 때
이미 발이 빠진 사람은 하얗게 사라진 자신의 하반신을 바라보며 덫에 걸리기 직전의 모습을 떠올린다
기쁠수록 혀를 내밀고 목줄을 당기는 강아지와 혀의 돌기만큼이나 촘촘한 인파 속에서
나는 헛도는 나사 하나를 움켜쥐고 가벼워진다
불 꺼진 방 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영혼의 윤곽들
교수대 위에 올라간 사내의 정수리 위에 빛 무리들이 우글거린다
곧 쏟아질 것 같다
김신혜 시인 / 원래 없었던 거라 생각하면
할머니는 죽은 할아버지의 사진을 자신의 사진 옆에 오려 붙인다
벽에 붙은 전단지를 바라보며
실종된 아이들이 커버린 모습을 상상한다 철봉 위에는 뒤꿈치에 피를 흘리던 새가 머무른다
처음으로 신발을 구겨 신고 달리던 순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라진 부족의 운율을 맞추는 내 보폭을 셀 수 없어서 무릎은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다
죽은 사람을 사진에 오려 붙이는 습관
아픔은 이미 아픔의 한가운데 와 있다 웅덩이에 고인 물 위로 물이 넘친다
후, 하고 불면 물결이 희미한 흉터를 가르고 있었다
되돌아오는 마음은 멀리서 보면 꼭 손을 흔드는 것 같다
가라앉는 사람과 떠오르는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다
김신혜 시인 / 토마토 축제
천막을 찢으며 걷는다 추락하는 천사들 방금 전쟁이 끝났어 귓가에 타오르는 폭죽 이건 재앙에 가까운 거야 그렇지만 재앙은 아니야 어떤 형벌도 내리지 않지만 품에 있던 칼을 내려놓지 못해
음성을 들으면서 상점들은 날마다 간판을 바꾼다 어제는 과일가게였던 곳이 오늘은 무기점으로 바뀌었어 방금 축제가 시작됐고
웃을 때마다 단내가 난다 이 도시의 날씨를 바꾸기 힘들겠지만 한 번 이빨이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너희들의 성전에도 훌리건들이 섞이겠지
붉은 것들을 벗겨내도 천사들의 굳은살은 진해지겠지 아스팔트 위에서 휘파람을 부는 이교도들 이 도시의 열대야를 만들고 있어
손에 쥐고 있던 토마토를 풀밭에 던지는 여자 지겨워, 중얼거리고는 쓰러진다 그는 맑은 날 자리에서 일어나 기관총을 쏠 거야 막 사람의 말을 배우고는 웃음을 터뜨릴지도 몰라
서로의 냄새를 알아채지 못하고 아직도 인파가 모여들고 있다고
검게 타버린 천사를 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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