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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연필 시인 / 순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4.

김연필 시인 / 순치

 

 

건물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 건물은 투명합니까 유리로 되어 있습니까 그 건물은 단단합니까 부스러지지 않습니까 부술 수 없습니까 그 건물을 깨도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습니까

 

건물은 흉물입니까 폐허입니까 건물의 기둥을 쳐도 건물은 여전히 건물입니까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건물은 건물일 수 있습니까 건물을 무너트리는 주문은 누구의 무엇입니까

 

입방체의 건물을 생각합니까 영혼으로 된 빌딩을 생각합니까 귀신이 되어 기둥 없이 빛만 머금는 탑을 생각합니까 그 탑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슬픔입니까, 아픔입니까? 우리는 살생을

하는 건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빛을 머금는 방식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건물은 아픔입니까, 죽음입니까? 그 건물은 부수고 부숴도 부서지는 것입니까

 

눈이 부십니까 빛이 멈춥니까 그래도 마음은 부서지지 않습니까 건물 안의 남자 하나 검은 물고기 남자 쥐치 같기도 한 복어 같기도 한 빛이 찌르면 몸이 부풀어 오르는, 남자가 부풀어 오르면 나타나는 여자가 있습니까 건물은 빛의 공간입니까 빛으로 나타나 빛으로 사라지고 건물이 사라지고 나면 건물은 증오입니까, 구원입니까? 멸망이라는 여자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입방체로 된 얼굴에 떠오르는 죽음이 있습니까 그 죽음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쥐치입니까 복어입니까 빛이 찌르면 그 눈은 어느 방향을 향합니까 빛을 무는 물고기의 이빨은 무엇까지 갉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태초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 태초는 투명합니까 유리로 되어 있습니까 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입방체입니까 슬픔입니까, 죽음입니까 영원의 기원입니까 유리로 된 남자가 평생 만든 어류는 어떤 고통의 비늘을 달고 태초의 폐허를 방황합니까

 

 


 

 

김연필 시인 / 어떤 것이라도 반복하면 우스워진다

 

 

한밤에 캐리어를 끌고 길을 가고 있습니다

황량한 주택가에 덜그럭 소리가 울립니다

 

긴 여행을 다녀왔는데 먼 길을 가야 합니다

공항에서 내려, 전철을 타고, 버스도 타고 왔지만

 

캐리어를 끌고 멀리 떠납니다 덜그럭댑니다

빈 수레는 요란하고 이 캐리어는 비었습니다 한밤은 정적이고 길가는 황량하고

 

가로등 불빛 하나 아스팔트 위에 서 있습니다

 

나의 캐리어는 텅 비어 시끄럽습니다 부끄러워 들고 가봅니다 들고 가기엔 또 조금 무겁습니다

팔이 떨어집니다 길가에 바닥에 땅에 떨어진 팔을 들고 어디를 얼마나 가야 할지

 

황량한 주택가, 나는 걸어야 할지 뛰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모두가 보고 있는 밤

이 길의 끝을 모릅니다 저기 가로등 끝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누군가의 눈이 마치 빛처럼

 

가벼운 인생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드륵드륵 끌려갑니다 가벼운 팔에 들려 가벼운 소리로

마음만은 가벼운 적 없습니다 로드무비의 끝은 그렇습니다 나는 독백자입니다 부끄러운

 

마음만은 가벼운 적 없어 마음을 들고 냅다 뛰고 싶지만 내 역할은

 

끝없이 황량한 주택가를 캐리어를 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긴 여행을 다녀왔는데 먼 길을 가며 생각하는

 

인물의 상황과 심리를 파악하자면, 사건을 알아야 하는데

인물은 끝없이 걸어 소실점 너머로 다가가고

 

나는 궁금합니다 감독은 언제까지 배우를 걸어가게 하려는 건지

 

한밤중에 감독이 캐리어를 끌고 걸어갑니다 그것은 무거워 보입니다

황량한 주택가에 덜그럭 소리가 울립니다 이제는 그것을 운명이라 말해 봅니다

 

ㅡ『문장웹진』 (2020, 9월호)

 

 


 

김연필 시인

1986년 대전에서 출생. 한양대 국문과 수료. 2012년 계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7인 공동 시집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을 때』에 일곱 편을 실음. 유튜브 채널 ‘김줄스 Zoolskim’에 종종 출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