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경 시인 / 서쪽 꽃밭
아침에 세어도 스물네 송이 저녁에 세어도 스물네 송이 비 온 후 세어도 스물네 송이 뻔한 것을 계속 센다 바람이 다녀간 후에도 나비가 다녀간 후에도 세고 또 센다 일 년을 기다려 만난 노랑 수선화 스물네 송이
작은 詩앗 채송화 《서쪽 꽃밭》(2020. 6. 고요아침)
나혜경 시인 / 스발바르국제종자저장고
스발바르, 하면 밥 냄새가 난다
죽어도 죽지 않는 지구의 목숨 있다면 첫밥은 그곳에서 짓겠지 얼음이 있던 자리에 쌀을 안치고 불을 지피고 뜸을 들이고 무너진 세계는 밥심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북극해 스발바르섬 암반 속에 모신 씨앗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 가여운 것들은 최후의 보루가 되어 최면에 걸린 듯 긴 잠에 들었다 처음도 끝도 아닌 아찔한 높이를 견디고 있다
뜨거운 밥보다 더 뜨거운, 찬밥 있다 손대지 말아야 할 밥이 먼 곳에 있으니 멸망을 염려하지 말라
오래된 가뭄에서 꺼내 듣는 빗방울 소리처럼 세상은 뒷주머니에 꼬깃꼬깃, 뛰는 심장 하나 접어 넣고 있다
나혜경 시인 / 약골 야행 습관
어둠 쪽으로 기운 중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들이 있다 우리 집 가구들도 모두 선천적 야행성인데, 저녁별이 자리를 펴고 식구들이 깊은 잠에 빠지면 우두둑 관절 꺾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해서 사경쯤 되면 더 요란해진다 책장이 골똘한 생각에서 빠져 나온다 소파가 자세를 바꾼다 장롱이 요 위에서 뒹군다 냉장고가 춥다고 점프를 한다 맹수보다 덩치 큰 것들이라지만 보기와는 달리 육식성의 습관이란 없다 제 몸을 조금씩 갉아먹을 뿐, 야행으로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 급기야 장롱의 아귀가 맞지 않는다 소파가 푹 꺼졌다 냉장고가 해소기침을 한다 유약한 것들은 무엇 하나 잡아먹지 못하고 자신만을 파먹고 산다 껍데기만 남아 쓸모없어질 때까지, 우리 집 집기들은 밤새 귀 부릅뜨고 그것을 다 듣느라 뼈만 남은, 나를 닮은 데가 있다
나혜경 시인 / 허용된 경계
롬복섬 셍기기 호텔과 앞바다 사이엔 있는 둥 마는 둥한 담장이 있다 허리에도 닿지 못하는 말뚝을 듬성듬성 박아놓았을 뿐 들락날락이 가능하여 장사꾼이 호텔로 들어와 값싼 목걸이와 티셔츠를 팔고 손님들도 심심하면 바다로 나가 파도를 탄다 기능을 하는 것도 일부러 안하는 것도 같은 담장을 보며 내 밀도 높은 관념 속 촘촘한 경계들의 이가 벌어진다 아무것도 막아서지 않는 느슨한 점선은 들어와도 돼 마음껏 나가도 돼 라고 말한다 흑과 백 직선과 곡선 위와 아래도 뒤섞으며 웃는다 네가 나의 땅에서 헤엄치고 내가 너의 바다에서 편히 걷는다 조깅하던 사람이 무거운 짐을 이고 간다 장사꾼이 바통을 이어받아 달린다
나혜경 시인 / 평면도를 그리다
낡은 집을 허물고 다시 지을 궁리를 합니다 방위는 당신들을 향합니다 내 몫의 그늘을 사방에 펼치고 고백하듯 무릎 꿇고 닦을 마루를 놓습니다 밤새워 엎드려 읽기에 좋을 눈이 초롱한 다락과 토해낸 쓸쓸까지 받아먹을 빈방도 필요합니다 이쯤에선 나와 짐과 집이 한몸이란 걸 증명하듯 구석구석 붙박이장을 짜 넣겠습니다 바람이 첨벙첨벙 걸어들어와 눅눅한 빨래와 제 발목을 말리게 수문 같은 담장은 걷어치우고 떨리는 손과 그리움 짙은 속눈썹을 꽂을 수 있게 대지 끝엔 다년생 우체통을 심겠습니다 마당엔 지친 말을 맬 버들 한 그루 세워둡니다 촘촘한 것들이 헐거워지는 때가 오면 짤랑짤랑 말발자국 떠나는 소리를 빈집은 배웅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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