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후 시인 / 이상한 이웃
귀퉁이부터 슬슬 닳아 없어지는 늦봄입니다
지우개를 빌리러 갔었지요 지우개를 빌려 쓰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귀퉁이가 같이 지워지는 이상한 지우개 그래도 문장 전체를 다 지우는 지우개는 없지요
글자를 지운 자리에 다시 글자가 들어서는 계절입니다 흐릿한 잔영 위에 동그란 마침표가 찍혔습니다 훤칠한 잣나무들을 제치고 새 이웃이 이사를 왔습니다 하루 만에 대문 없이 문패를 달았습니다 흔들리는 글자들을 솎아내고 마침표를 식자하는 지우개의 작업입니다 서먹한 사후가 터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사후가 푸르러질까요?
풀포기 자라나는 지붕과 빗소리 요란한 이웃의 관계란 빌려 쓸 게 별로 없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지우개가 원하는 일일까요?
하루 만에 생긴 길은 한 사람만 다니는 샛길입니다 지우개가 다니는 길입니다
『분간 없는 것들』,김은후 , 시인동네, 2016, 30~31쪽
김은후 시인 / 어둠이 날아간 곳
행선지가 다 떠나버린 버스정류장 잠깐의 정적, 그 속에 새 떼들이 앉는다
어둠이 날아가 버린 곳에서는 느긋하게 먹을 수 있는 휴일이 없다 어둠의 씨 같은 쥐똥나무 열매들 맨 아래에서 올라온 꽃은 맨 위의 문이 되고 어느 씨앗은 새들의 위장에서 하늘을 건너다니고
새들이 두리번거리는 것은 날개를 접었기 때문이다. 급히 날아오를 때엔 배차 시간이 따로 없다 숫자와 목적지만 포르륵, 오르내리고 있다
결국 새들을 키우는 것은 불안이다 소리에 스스로 놀라는 새들은 바람 불어 흔들리는 나무에는 놀라지 않아
쥐똥나무가 흔들린다 안심한 모습으로 편안하게 흔들린다 쥐똥나무라는 이름이 제격인 것은 쥐들의 불안함을 새들이 먹고 살기 때문일 것이다
파릇해진 봄날이 푸드득 날아가고 있다
시집 『2퍼센트 동화』 2021. 한국문연
김은후 시인 / 2퍼센트 동화
태초에 술 한 모금이 있었다
촘촘히 밀봉해도 빠져나가는 2퍼센트의 취기가 있다 지고 가지는 못해도 마시고 가라면 다 마실 수 있다던 작은아버지의 변명 술버릇을 만나는 순간 불콰한 흥이 되기도 온갖 욕설이 되기도 하지 벌겋게 달아오른 광기 속, 가끔 제정신이 들 때도 2퍼센트라 하자
비가 오고 우묵한 데 물이 고였다 버찌가 떨어지고 2퍼센트 주정이 숨어들었다 사슴이 와서 불안을 마시고 갔다 뿔이 한바탕 노래를 불렀고 노래에선 진한 벚꽃 냄새가 났다 동무들 데려와 홀짝홀짝 들이켜고 궁둥이를 맞대고 춤을 추었다 구름으로 잘 덮어두고 다시 찾은 주점에 술이 사라졌다 뿔들은 구름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건 천사의 몫이야 다시 비를 기다리고 버찌를 기다려야 해 한 해를 기다리라고! 뿔들은 뛰어가며 술,술,술 했다
마지막까지 술이 가득 차 있던 작은아버지 몸에서 생전이 빠져나갔다 우리는 누구도 만나지 않은 발효 기간과 선량한 2퍼센트와 취기의 독과 천사의 몫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시집 『2퍼센트 동화』 2021. 한국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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