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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중하 시인 / 자화상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5.

황중하 시인 / 자화상

 

 

나는 불행했고 불행하고 또 불행하다.

 

내가 그린 나의 얼굴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러 겹 덧대어 그린 불안한 선들과

우울한 형태들

 

내가 믿고 싶은 진실은

언제나 스케치의 뒷면으로 사라진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황홀한 진실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를 향해 열려 있지만

늘 깜깜했다.

 

어둠 속에 추락한다.

상처 입은 채 깨어난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끼며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본

도화지 속 나의 얼굴

 

그것은 내가 그린 타인의 거짓말

 

처음부터 나의 불행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황중하 시인 / 양변

 

 

나는 지금 예민하다.

 

당신을 삭히기 위해

온몸의 거품을 끌어 올려야만 한다.

 

당신은 불안을 잊는다.

나는 홀로 감정을 곱씹는다.

 

당신에 대한 나의 감정

당신이 남긴 감정의 진실

 

언제쯤 불안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온몸의 거품을 끌어올린다.

나는 아직 예민하다.

 

아직 나는 당신을 처리 중이다

 

 


 

 

황중하 시인 / 사직서가 운다

 

 

1년 4개월 동안의 동면을 견뎌낸 사직서. 사직서가 팩스 속에서 몸부림치며 깨어난다. 그리고 천천히 30초의 시간을 읽어 내려간다.

 

하얀 침대 시트 위에 누워 있던 환자. 꿈틀거렸던 환자의 손. 그 손의 치욕이 죽기보다 싫었던 30초. 끝내 편집하고 싶은 슬로우 비디오의 영상. 그 30초가 내게 먹구름을 데려왔다. 그 30초가 내게 잡풀 같은 괴로움을 주었다.

 

사직서가 사직서 속의 나를 고스란히 읽어준다.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던 날의 나를 읽어준다. 30초의 필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내 실명과 함께 음성으로 재생된 5분. “이것은 분명한 프라이버시의 침해입니다.” 문제제기를 해야만 했던,

 

사직서가 운다. 울며 외친다. 수차례 항변했지만 끝내 묵살되고 말았던 말들. 나의 입장을 변호하는 사직서가 최후의 변론을 한다.

 

팩스가 사표를 받아먹고 비명을 지른다.

삐—이—익—

 

 


 

 

황중하 시인 / 빗방울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려먹었다는 생각

 

칼날 같은 빗방울은 내리고

나의 뇌리를 뚫고 들어오는 빗방울의 생각들

나의 자궁까지 쳐들어오는

칼날 같은 생각들

 

알코올도 수면제도 없이

그 어떤 치명적인 무기도 없이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다는 생각

무엇으로 이 고통을 끝낼 수 있을까

오염된 빗줄기가 내리고

꽃도 나뭇잎도 빗방울에 젖는다

 

나는 하염없이 추락하는 빗방울

마침내 바닥까지 닿아 온몸이 골절되는 빗방울

 

나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피와 식은땀으로 얼룩진 밤

 

오염된 빗방울의 일그러진 형태들

울부짖는 빗방울들

 

어차피 이번 생은 틀려먹었다는 생각

 

-황중하 시집, 『아직 나는 당신을 처리 중입니다』

 

 


 

황중하 시인

1982년 경기도 광명에서 출생. 안산대학교 간호학과 졸업.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2013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