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 시인 / 저무는 시간
낮이 반원을 그리며 사라지는 시간 산등성이가 무거워지고 새들의 울음이 저무는 산을 넘어올 때 숲은 남아 있는 온기를 나누어 가진다
분꽃이 입을 여는 소리에 어머니가 저녁 밥 안치는 소리 방죽에 묶인 염소 울음이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둥지 떠난 새들이 날개를 접을 때 나무들도 잠자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시장골목 국밥집 훈김이 오르고 웃음이 둘러앉는 시간 여미었던 옷깃 헐렁해지고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고 싶은 시간 윤슬로 반짝이는 저녁 강 건너 떠났던 소리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 오후가 마감되고 저녁이 열리는 소리 하루의 노동을 끝낸 지친 발걸음 소리 아버지는 어제보다 더 저물어 돌아왔다
손영 시인 / 꽃이 피지 않는 식탁
식탁에 마주 앉아 늦은 아침을 먹는 그녀와 그 식사 내내 말 한마디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꽃이 활짝 피던 식탁에 이제 더는 꽃이 피지 않는다 먼저 수저를 놓은 남자가 거실 소파로 간다 어깨를 짓누르던 침묵이 따라간다
남자는 습관처럼 소파에서 리모컨을 집어 들고 채널을 누른다 서바이벌 게임을 하던 출연자가 넘어지자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화면에서 쏟아진다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어 베란다로 나간다
깨작이며 밥알을 세던 여자가 반쯤 남은 밥그릇과 식탁을 치우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문이 열릴 때마다 장식장 위의 먼지가 문갑 아래로 가라앉는다 안방 TV 드라마를 틀어놓고 한나절이 넘도록 문이 닫힌 그녀의 고치 같은 방
여전히 TV는 웅얼거리고 남자는 소파에서 낮잠을 잔다 슬리퍼 소리와 식탁의자 끄는 소리가 사라진 거실에는 베란다 창을 넘어 온 오후 햇살, 그 한 줄기 햇빛에 뿌연 먼지만 반짝인다
마음의 벽에 익숙해져 간다 서로에게 길들여져서 멀어져 간다
손영 시인 / 일몰의 교대식
낮과 밤의 교대식이 열린다 지평선 끝없이 펼쳐진 산언덕에서
산등성이에 걸린 해가 순식간에 들판 아래로 떨어지고 서쪽하늘은 노을을 켜고 있다
먼 바다를 건너온 저녁의 발소리에 주춤주춤 낮이 물러가는 소리
야근을 서두르는 저녁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하루의 노동을 마감한 낮이 앞치마를 풀고 있다
집집마다 설거지를 마치고 TV 뉴스에 한눈을 파는 동안 낮과 밤이 섞이는 소리
이제 장엄한 의식이 끝났다 빈틈없이 사방이 캄캄해졌다
손영 시인 / 베껴 쓰기
식물의 생존전략은 의태擬態 옥수수를 베껴 쓴 옥수수밭의 기다란 풀 동글 넓적하게 콩잎을 베껴 쓴 콩밭의 풀 잡초들이 능청스레 베껴 쓰기를 하고 있다
풀과 작물의 모호한 경계 구분이 어려운 초보농사꾼 어린 작물을 뽑아버리고 잡초들을 남겼다 본색을 알기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풀들의 얼굴이 탱탱해지고 뒤늦게 근본이 떠올랐지만 이미 영역을 차지한 뿌리의 세력 호미의 끈기에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오독으로 사라진 콩과 옥수수 밭고랑으로 뽑아 던진 서리태는 죽고 명아주만 싱싱하게 살이 오른 나의 첫 농사,
그럴듯한 필체로 밭고랑까지 차지한 그들의 전략은
어눌한 호미를 번번이 속인다
손영 시인 / 아름다운 잠입
빗방울이 강물 속으로 들어간다 망설임 없이
강물은 싫은 기색 없이 비를 받아들인다
빗물이 스미는 소리 강물은 한 가족으로 비를 맞이한다 물과 물이 합쳐지는 순간 나타나는 둥근 파문
빗줄기는 소리로 계약서를 쓴다 수많은 물도장을 찍는다 이것은 오래 전 둘만의 약속 한 번도 파기한 적 없는 물도장 계약서가 사방에 낭자하다
청아한 톤이 강물에 찍히는 소리 수많은 비의 음성 강물은 떨어지는 목소리에 귀를 세운다 빗소리를 녹취하고 쏟아지는 하늘을 저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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