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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태형 시인 / 당신 생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5.

김태형 시인 / 당신 생각

 

 

필경에는 하고 넘어가야 하는 얘기가 있다

무거운 안개구름이 밀려들어

귀밑머리에 젖어도

한번은 꼭 해야만 되는 얘기가 있다

잠든 나귀 곁에 앉아서

나귀의 귀를 닮은 나뭇잎으로

밤바람을 깨워서라도

그래서라도 꼭은 하고 싶은 그런 얘기가 있다

 

- 시집 <코끼리 주파수>(창비, 2011)

 

 


 

 

김태형 시인 / 외로운 식당

 

 

초행이라 길 찾기 바쁜데도

길가 음식점 간판에 눈길이 머뭅니다

뭐 좀 새로운 게 없을까 싶어 찾아든 식당

빈자리 하나 잡기도 쉽지 않군요

그 틈새에 겨우 끼어

돌솥밥 한상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손님들 뒤쪽으로

기러기탕 백숙 육회

이 집 특별식 메뉴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습니다

식용으로 사육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기러기라니

멀건 하늘처럼 끓고 있는 탕 속에서

보글보글 날고 있는 기러기들

먼 길 떠나는 날갯짓 소리는

사람들 시종 떠들어내는

온갖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습니다

저 늙어가는 사람들이 차라리

어디 가서 조용히 불륜이라도 저질렀으면 하고

측은해집니다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기러기 한 마리씩 뜯어먹는 대신

뭔가 그리워하는 얼굴로

안타까워하는 모습들로 앉아 있으면 안되나

아까 올려다본 흐린 하늘의 기러기떼가 아니었으면

내가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을 뻔했습니다

 

- 시집 <코끼리 주파수>(창비, 2011)

 

 


 

김태형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 가을호에 7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민음사, 1995)과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문학동네, 2004)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