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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준 시인 / 마음 한철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25.

박준 시인 / 마음 한철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박준 시인 / 지금은 우리가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박준 시인 / 눈을 감고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

.

역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 다

.

.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박준 시인 / 눈썹 -1987년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飯店)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 다녔다

 

 


 

박준 시인

1983년 서울에서 출생. 2008년 《실천문학》에〈모래내 그림자극〉이 당선되어 등단. 2012년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출간, 2013년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