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시인 / 마음 한철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박준 시인 / 지금은 우리가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박준 시인 / 눈을 감고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 . 역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 다 . .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박준 시인 / 눈썹 -1987년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飯店)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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