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복희 시인 / 착한 마을의 풍경
울타리가 없는 집에는 소란이 들락거렸다 개기월식의 날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어댔다 빈혈이 쓰러트린 창백한 얼굴은 깨어나지 못했다 매몰된 돼지들의 피가 솟구쳐 도랑으로 흘러갔다 소문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자랐다 밤을 갉아대는 쥐들이 골목에 넘쳐났다 소독차가 돌았지만 불안은 손톱 속으로 파고들었다 죄는 온유한 미소를 띠고 등에 칼을 꽂았다 따뜻한 것들에는 무기력한 냄새가 났다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자들만 고해성사가 허락되었다 나는 상자에 갇혀 부족한 산소를 반으로 줄여 사용했다 그리운 당신은 저수지 건너편 방에서 박제가 되었다
도복희 시인 / 조련사
무화과 숲을 통과하여 왔어요 첫날은 검은 우산 속으로 장대비가 들이쳤죠 나는 까마귀 조련사로 이직을 신청했구요 신종직업으로 분류 된 상태에서 칠일 만에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죠 십칠층 계단을 오르면서 깃털 고르는 방법에 대해 정리했어요 운전면허 이론시험처럼 정답만 달달 외우기 시작했죠 위로 오를수록 바람이 무성해지더군요 정오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눌렀어요 고압전선에 앉아 있던 까마귀들 이주한 십칠층 허공이 내 일터입니다 도착한 후, 창문을 떼내어 바람을 교체하는 일이 첫번째 과제죠 검은 날개의 상태와 눈빛의 밝기를 체크하여 알맞은 먹이를 곳곳에 놓아 두어야 합니다 둥지 곳곳을 살펴 깃털이 상하지 않도록 모서리를 다듬는 과정도 빠뜨려선 안되요 나는 훈련 받은 까마귀 조련사입니다 새롭게 시작한 일이어서 계단을 줄이는 것이 뜻대로 안되지만 새로 돋아나기 시작한 날개가 적응해 나갈 거예요 난간을 붙드는 일이 무료를 견디는 오전보다 훨씬 수월하다는 걸 알아요
도복희 시인 / 건너편 소녀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연신 안면근육을 씰룩거린다 일그러진 웃음, 과장되게 끌어당기는 시선 광장에서 마주했던 마임의 주인공처럼 그녀의 분장은 일관되게 슬픈 4차원이다
레몬향의 추파춥스를 빨며 길을 걸어왔다 오늘의 퍼포먼스는 가능한 삐딱해지는 것 바닥으로 내려가는 자세에 익숙해진 근육들이 다소 놀라겠지만, 십대의 마지막은 역류하는 은어로 펄떡이는 것
차들이 속도를 높이는 동안 붉은 신호등에 갇힌 걸음 반란할수록 파열하는 표정들 붙잡아둘 수가 없다 각색되지 않은 수신호가 손끝에서 굴러떨어진다
맑은 가을 햇살아래 불협화음으로 뻗어가는 뒤틀린 괴성 풀린 나사들의 헐거움처럼 덜그럭대는 저 울음들
- 2013년 <시와 소금>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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